남산교회

남산교회
로그인
생명의 말씀

목회단상

가까이 가는 사랑

페이지 정보

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434회 작성일Date 25-04-16 14:02

본문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비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알만한 이야기입니다.
본래는 ‘선한’ 이라는 단어가 함께 사용된 것은 아니나, 그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어느 누가 보아도 선하다는 것이 인정되기에 별칭처럼 붙여서 사용합니다.
그 별칭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선하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감대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비해 절박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보고도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은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강도 만나 거의 죽게 된 사람을 외면했고, 사마리아 사람은 그 위기에 처한 사람을 구하는 길로 가게 되었는지가 궁금해집니다.
분명 세 사람이 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위기에 처한 사람을 보았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그런데 그 반응이 다릅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 피하여 갔다”라고 하고, 사마리아인은 “보고, 가까이 갔다”라고 합니다.
어떻게 똑같은 상황을 보고 이렇게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될까요? 그 차이는 외면한 두 사람에게는 없고,
구하는 길로 간 사마리아인에게는 있는 것으로 인해 갈라집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보고, 피하여 갔다”는 것으로 상황을 본 것과 피하는 것 사이에 그 어떤 마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에게는 보고와 가까이 갔다 그 가운데 그의 마음이 존재합니다. 바로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갔다”고 합니다.

    중심에 있는 이 마음 하나가 모든 상황을 뒤바꿉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여 회복케 하는 길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어디서 온 것일까요? ‘불쌍히 여기다’라는 단어는 결코 가볍지 않습니다.
헬라어로 ‘스플랑크니조마이’로 사람의 장기일체를 의미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온 말입니다. 우리말로 의역하면 ‘애간장이 녹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만약 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어쩌다 한 번이라는 일회성, 혹은 두서너 번으로 끝나고 말 것이라면 사람에게서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으로 다가온 율법교사에게
그 길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란 점에서 결코 단회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를 물으시고 율법교사는 즉답을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눅 10:27)하였다는 응답입니다.
예수님이 옳다고 하시며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고 하십니다.

    그럼 이 사랑은 횟수가 정해진 것은 아님이 분명합니다. 지속성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 영원성까지 담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사랑으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이 영생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함이 담겨있다면 이것은 결코 사람에게서 근본된 것일 수 없습니다.
영원성은 하나님의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사랑을 받지 않으면 그 사랑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사마리아인은 바로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바로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만이 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마리아인의 앞에 붙은 수식어인 ‘선한’이란 단어는 인간의 것이 아닌, 하나님의 성품을 뜻하는 것이 분명합니다(눅 18:19).
하나님의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한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이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가까이 다가가야 할 사람은 누구일까요?
위기에 처한 사람일수도, 혹은 친구일수도, 혹은 상처를 주고받은 사람일수도, 혹은 원수일수도 있습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