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것을 넘어 마음으로 들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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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53회 작성일Date 25-04-26 16:05본문
‘듣는 것’보다 ‘보는 것’이 더 확실하고 분명하다는 것은 어느 누구나 경험을 통해 공감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이었던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함에도 인정치 않고
자신이 직접 못 자국, 창 자국을 확인해야 믿겠다고 합니다. 보는 것이 곧 믿음으로 연결된다는 인생의 이치인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진리라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설 곳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 또한 성도들을 향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꼭 보는 것만이 믿음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과 신약시대를 비교하며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그래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았으니 우리보다 훨씬 낫다”라는 소리입니다.
그때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인도가 있었는데 지금은 말씀으로밖에는 인도함을 받지 못하니 따라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인도자가 있으면 선택이 훨씬 쉽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갈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에 대한 결정권은 사람의 편에 주어져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일지라도 선택은 마음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은 물론 짐승들까지 함께 광야를 걷노라면 그 힘겨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민수기 9장 15-23절에는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광야를 지날 때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예로 들며 여호와의 명령 따라 순종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몇 날을 움직이다 구름이 내려 앉아 지치고 상한 몸을 잠시 쉬려 할 때 구름이 순식간에 떠오를 때면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구름이 1년이고, 2년이고, 10년이고 떠오르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비록 구름의 움직임이 가시적이기는 하나 너무 빠르게 움직일 때도, 반대로 너무 더디게 움직일 때도 다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니
인생의 감정을 내려놓고 무조건 순종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가시적 현상보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쯤 로마의 비세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시를 덮쳤을 때 모두가 피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폼페이에는 약 5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화산이 거대한 폭발을 하기 전 며칠 동안 화산재가 조금씩 뿜어져 나오며 전조증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기간 동안 가난한 시민들과 노예들은 대부분 서둘러 피난을 갔으나,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던 귀족들과 상인들 2천여 명은 자기의 저택과 부를 지키려다
화산재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눈으로 보며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다 결국 죽음으로 끝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이미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말씀 속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갈 길을 지시하는 것처럼 “하라, 하지 말라, 가라, 가지 말라”라는 명확한 지시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까지도 선명하게 알려줍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 이 길은 가라, 저 길은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신 10:13; 요 15:11).
결국 늘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그 길을 인도하시니 보는 것을 넘어 듣는 마음을 구하시면 됩니다.
김 재 구 목사
그래서 그런지 열두 제자 중의 한 명이었던 도마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함에도 인정치 않고
자신이 직접 못 자국, 창 자국을 확인해야 믿겠다고 합니다. 보는 것이 곧 믿음으로 연결된다는 인생의 이치인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진리라면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요 20:29)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설 곳이 없어집니다.
그리고 베드로 사도 또한 성도들을 향해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 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꼭 보는 것만이 믿음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구약과 신약시대를 비교하며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구약시대에 이스라엘은 그래도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받았으니 우리보다 훨씬 낫다”라는 소리입니다.
그때는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인도가 있었는데 지금은 말씀으로밖에는 인도함을 받지 못하니 따라가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물론 눈에 보이는 인도자가 있으면 선택이 훨씬 쉽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갈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선택에 대한 결정권은 사람의 편에 주어져 있습니다.
즉 눈에 보일지라도 선택은 마음의 결정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부터 노년은 물론 짐승들까지 함께 광야를 걷노라면 그 힘겨움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민수기 9장 15-23절에는 구름기둥의 인도를 받으며 광야를 지날 때 발생할 수 있는 다양한 상황을 예로 들며 여호와의 명령 따라 순종할 수 있는가를 묻습니다.
몇 날을 움직이다 구름이 내려 앉아 지치고 상한 몸을 잠시 쉬려 할 때 구름이 순식간에 떠오를 때면 어찌할 것인가?
그리고 구름이 1년이고, 2년이고, 10년이고 떠오르지 않으면 어찌할 것인가?
비록 구름의 움직임이 가시적이기는 하나 너무 빠르게 움직일 때도, 반대로 너무 더디게 움직일 때도 다 사람의 마음을 거스르는 것이니
인생의 감정을 내려놓고 무조건 순종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만은 아닙니다. 가시적 현상보다 마음으로 듣는 것이 필요합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쯤 로마의 비세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시를 덮쳤을 때 모두가 피할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폼페이에는 약 5만 명 정도의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화산이 거대한 폭발을 하기 전 며칠 동안 화산재가 조금씩 뿜어져 나오며 전조증상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 기간 동안 가난한 시민들과 노예들은 대부분 서둘러 피난을 갔으나, 돈과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던 귀족들과 상인들 2천여 명은 자기의 저택과 부를 지키려다
화산재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분명히 눈으로 보며 확인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의 마음을 따라 살아가다 결국 죽음으로 끝나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만이 다가 아닙니다. 이미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말씀 속에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갈 길을 지시하는 것처럼 “하라, 하지 말라, 가라, 가지 말라”라는 명확한 지시가 들어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은 왜 그렇게 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까지도 선명하게 알려줍니다.
가장 큰 이유는 우리의 행복을 위하여 이것은 하라, 저것은 하지 말라, 이 길은 가라, 저 길은 가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신 10:13; 요 15:11).
결국 늘 함께하시는 성령께서 그 길을 인도하시니 보는 것을 넘어 듣는 마음을 구하시면 됩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