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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는 자에서 치유하는 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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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111회 작성일Date 20-12-24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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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날에 예수님처럼 많은 사람을 만나셨으며 또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고 다니신 분도 드물 것입니다. 그 만남의 폭도 넓으셔서 어린아이들로부터 노인까지, 가난한 자, 부유한 자, 기득권자, 소외된 자, 병든 자, 귀신들린 자, 문둥병자, 심지어는 죽은 자들까지 그분의 관심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중에는 예수님의 길을 걷겠다고 따라 나선 제자라고 불리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삶에 비교 한다면 요즘 신앙인들의 삶은 무척이나 개인적이며 폐쇄적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사람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고 심지어는 치유되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정신적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과 동거동락 하신 예수님은 사람으로 인해 상처받으셨다는 이야기가 없음에도 양적으로 비교도 안될 만큼 적은 만남에도 우리가 상처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속성을 정확하고, 날카롭게 간파하셨다는 것이 답일 것입니다. 다음의 내용이 그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사람에 대하여 누구의 증언도 받으실 필요가 없었으니 이는 그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음이니라”(요 2:23-25). 이러한 사람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이 우리 예수님을 상처받는 존재가 아닌 치유하는 존재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했으리라 확신합니다. 사람이 같은 사람에게 실족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의지와 기대 때문일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의지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기대하는 것이 높으면 높을수록, 원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큰 좌절과 실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때로는 의지하지도 않았고, 기대감마저 없었던 사람에게조차 당하는 상처가 사람에 대한 불신을 더욱더 고조시키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처와 실족이 반복될 때 사람 사이에는 더 이상 건널 수 없는 불신의 골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일상을 통해 겪는 이러한 일들을 다 겪으셨던 분이십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듣고 감격하고, 놀랬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하며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는 것을 목격했습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욕망이 아닌, 하나님의 뜻만을 이루려하자 한 제자로부터 배신당하고, 팔리게 됩니다. 그리고 주님을 따르며 기적을 체험하고 말씀을 듣고 감격하던 그 군중들은 폭도가 되어 예수님의 십자가형을 부르짖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삼년여의 세월을 동거동락 했던 제자들은 모두 제 목숨을 구하려고 예수님을 부인하고 저주하며 도망갔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그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으셨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위해 그 고통의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셨으며, 자신을 처절한 외로움에 몰아넣은 그 제자들을 부활하신 후 가장 먼저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사람이해가 예수님을 상처받는 삶이 아닌 치유하는 삶으로 완주하게 했을 것을 짐작케 합니다. 사람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오늘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 서있는 우리들에게는 상처받는 존재가 아닌 치유하는 자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삶에 다시 되살려야만 하는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사람이해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사람은 결코 의지의 대상이 아니라 의지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 그리고 사랑하기에 앞서 사랑 받아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을 늘 잊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가 우리 또한 상처받는 자가 아닌, 예수님처럼 치유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할 것입니다.
김재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