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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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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936회 작성일Date 21-03-02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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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를 하면서 제 자신에게 “가장 큰 목표가 무엇인가?”를 자주 질문 해 봅니다.
교회 성장의 시대는 지났다고 하는 이 시기에 교회를 부흥시켜 주변 교회들이 성장의 본으로 삼는 교회가 되는 것은 제 성향 자체에 안 맞습니다.
그렇다고 열방을 품고 선교하여 하루빨리 온 세상에 복음이 전파됨으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하자라는 포부도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어딘가로 오가는 것 자체가 부담스럽고, 맡겨 주신 한 교회를 잘 이끌어 가는 것조차 버거워하는 미력한 사람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무언가를 해서 제 자신의 이름을 내고자 하는 것도 이미 예수님을 알아버렸기에 물 건너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망해간 수많은 사람들을 알고 있고, 또 현재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얼마나 호된 책망을 받을 것인가도 가슴 깊이 새기고 있기에 소심한 제게는 남의 일일 뿐입니다.

그럼에도 늘 마음속에 목회의 길을 통하여 이루고 싶은 한 가지가 있습니다.
바로 ‘일상의 그리스도인을 세우는 일’입니다.
‘일상의 그리스도인’이란 신앙과 일상이 결코 분리되지 않고, 신앙이 일상이 되고, 일상이 신앙이 되는 삶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향하여 주신 성경의 단 한 권도 신앙을 가능케한 은혜와 그 은혜에 응답하는 삶을 분리하여 기록한 책이 없습니다.
즉 성경 중에 은혜로 가능케 된 신앙인 믿음만 말하는 책이 없고, 그 은혜에 바탕을 둔 신앙은 빼버리고 행함만 말하는 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장 분량이 적은 한 장짜리 서신들만 살펴보아도 이 사실은 명백히 드러납니다.
요한이서는 행함을 말하기 전에 “택하심을 받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한다”(1:1)고 명시하며 구속의 택함이라는 신앙의 근본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요한삼서 또한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1:11)는 말씀을 통해 선한 행함의 근원이 하나님을 뵈온 은혜의 신앙에 기초한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유다서도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1:1)고 하며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고 권면합니다.
이처럼 신앙과 행함이라는 일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서와 야고보서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있습니다.
로마서는 믿음만 말하고, 야고보서는 행함만 말한다는 것으로 이것은 오해를 넘어서 말씀에 대한 왜곡입니다.
만약 로마서가 구원을 위해 믿음만 말하고, 행함을 결코 말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반쪽짜리 복음도 아니고, 이단적인 복음입니다.
그리고 야고보서가 믿음을 제쳐두고 행함만을 강조한다면 그것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이 결코 아닙니다.
로마서의 시작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3:24)는 것을 믿는 신앙을 강조하며, 그 결론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12:1)의 일상으로 완성됩니다.
야고보서 또한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2:5)는 믿음의 근원을 강조하며,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2:22)고 강변합니다.

이렇게 은혜에 바탕을 둔 신앙과 행함이라는 일상은 태양에서 빛을 분리할 수 없고, 불에서 열을 분리할 수 없으며, 살아있는 사람에게서 호흡을 분리할 수 없듯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형도 시인의 ‘우리 동네 목사님’이란 시에서 자고로 갚을 수 없는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는 “성경이 아니라 생활에 밑줄을 그어야 한다”는 일침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결론이 될 것입니다.
김재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