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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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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694회 작성일Date 21-12-08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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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논리로 따진다면 약한 것은 약한 것이고, 강한 것은 강한 것이라는 명제가 성립될 것입니다.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없고, 강한 것은 약한 것에 결코 무릎을 꿇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로 통하는 곳이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약육강식이라는 죄의 속성이 그대로 발휘되는 세상에서는 그에 대한 역설은 그저 몇 안 되는 예외에 속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에서는 다릅니다. 바울 사도의 고백을 빌리자면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는 말도 안 되는 역설이 정설이 되고 진리가 되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속에는 수많은 기적 이야기들이 등장합니다. 늙어버려 생식능력이 사라진 아브라함과 사라를 통해 아들이 탄생하고, 홍해가 갈라지며, 반석에서 물이 나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리며, 900대의 철병거가 일시에 무력화되고, 십팔만오천 명의 앗시리아 군대가 하루아침에 전멸합니다. 그리고 문둥병자가 고침을 받고, 삼십팔년 동안 움직이지 못했던 중풍병자가 거뜬히 일어나 침상을 들고 걸어가며, 죽은지 나흘이 되어 부패한 냄새가 나는 나사로가 살아납니다. 참으로 다양한 삶의 정황 속에서 나타나는 사람의 이성과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기적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통점 속에 신앙의 신비가 있고, 세상의 논리를 거스르는 역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의 무력함에 응답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며, 사람의 고통을 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입니다. 세상의 위력 앞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리를 치러 오는 이 큰 무리를 우리가 대적할 능력이 없고 어떻게 할 줄도 알지 못하옵고 오직 주만 바라보나이다”라는 탄식의 간구가 있는 곳에 능력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자식의 고통을 바라보며 아무것도 해 줄 수 있는 것이 없어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막 9:22)라는 고통스런 호소가 있는 곳에 긍휼하신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십니다. 우리의 무력함과 연약함 그리고 해결점이 없어 보이는 고통스런 상황들이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하나님을 만나고, 체험할 수 있는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약함은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기적을 보는 긍정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에게 세 번씩이나 하나님께 간절한 간구로 나아가게 만들었고, 없애 주기를 원했던 육체의 가시,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심각한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러기에 계속적인 간구를 올려드렸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에게 주신 복음 전파에 대한 열정의 무게만큼이나 그의 삶을 무겁게 짓눌렀을 것이 바로 이 육체의 가시였을 것입니다. 복음을 향한 열정은 하늘로 끝없이 치솟아 올라가는데 ‘육체의 가시’는 계속해서 그 열정을 끌어내리는 ‘사탄의 사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고후 12:7). 하나님께서 왜 그러셨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바울의 그 간절한 간구에 못 이기는척 그 육체의 가시만 제거해 주셨다면 바울이 어디까지 어떻게 복음을 더 열정적으로 전파하였을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염려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를 연약하게 만드는 육체의 가시가 제거된 바울의 강함은 역으로 작용하는 흉기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육체에 가시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은혜가 족하게 임하고 있음 또한 고백하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자신의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을 깨달았다고 합니다(고후 12:9). 그래서 약한 것과 능욕, 궁핍, 박해, 곤고를 제거해 달라는 기도가 아니라 자랑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자신이 약한 그 때에 하나님의 강함이 역사하는 통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처럼 지금 이 순간 육체의 역약함과 삶의 무능함, 자녀에 대한 무력감을 호소하는 우리 모두에게 그리스도의 능력이 온전하여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김 재 구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