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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남산교회 &amp;gt; 커뮤니티 &amp;gt; 목회단상</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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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본향을 향하는 순례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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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바쁘고, 경쟁이 치열한 세상 속에서 사노라면 고향 생각이라는 것을 할 여유조차 없이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br/>그리고 굳이 고향 생각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은 간간이 향수는 불러 일으킬지는 모르겠지만 그곳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br/>그러나 이 땅의 고향은 그렇게 잊고 살아도 상관이 없지만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br/>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게는 영원한 본향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br/>그리고 그 본향은 반드시 돌아가야만 하는 장소입니다. <br/><br/>&nbsp; &nbsp;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고, 그곳으로 돌아가야 함을 거듭 강조하셨습니다:<br/>&nbsp;“내가 아버지에게서 나와 세상에 왔고 다시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노라”(요 16:28; 참조, 요 13:3; 8:14). <br/>이것은 곧 우리의 길이기도 합니다.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하라”(전 12:7). <br/>“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br/><br/>&nbsp; &nbsp; &nbsp; 이렇게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가 명확하다면 우리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우리는 ‘본향을 향하는 순례자’입니다. <br/>순례자는 출발지로부터 시작하여 목적지를 향하여 계속해서 이동합니다.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이동을 멈추지 않습니다. <br/>물론 간간이 어떤 장소에서 해야 할 사명이 보인다면 그곳에 일정 기간 체류할 수도 있지만 정착민으로서의 정체성이 아니라, 순례자의 정체성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br/>그래야만 목적지를 향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nbsp;  요셉과 형제들의 이야기 속에 이 순례자의 길을 완주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br/>요셉이 형제들을 만났다는 전갈을 받고 애굽의 바로가 전하는 명령 속에서 순례자의 삶을 어렴풋이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br/>바로가 형제들에게 명령하기를 가나안 땅에 이르거든 아버지와 가족들을 이끌고 자신에게로 오라고 합니다. <br/>그러면 애굽의 좋은 땅을 주고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는 약속을 줍니다. <br/>그리고 가나안이라는 출발지에서 애굽이라는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길 양식을 주고, <br/>이동의 편의를 위한 수레를 제공하고 또한 옷도 제공 받습니다. 그리고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까지도 넉넉히 챙겨 줍니다.<br/>&nbsp;<br/>&nbsp; &nbsp; &nbsp; 이 상황을 통해 천국을 향한 순례자의 삶을 묵상해 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는 곳에서 천국으로 초청을 하셨습니다. <br/>그리고 그 천국에 이르기까지 필요한 모든 것 양식은 물론, 편의를 위한 시설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이 누리는 아름다운 물품들까지 누릴 수 있는 기쁨을 허락하셨습니다. <br/>그런데 바로의 마지막 명령을 통해 순례자로서 한 가지 깊이 숙고하며 지켜야 할 것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br/>&nbsp;“또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창 45:20). <br/>‘기구’는 세상 사람들이 세상 속에서 버티며 살아가기 위해 모아둔 것들을 의미합니다. 많은 것들이 이에 포함될 것입니다. <br/>돈, 인기, 권력, 성공, 명예, 쾌락, 익숙함, 세상적인 안정 등과 같은 것을 싣고서는 순례의 길을 계속할 수 없습니다.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br/>기꺼이 세상에 줄 것은 주는 것입니다. 주께서 공급해 주시는 것으로 이 순례의 길을 완주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05 Jun 2026 16:28:1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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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여, 주여, 주여!</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기도에 간절함이 더해질 때, 우리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외침이 있습니다. <br/>바로 한국 교회 성도들에게 친숙한 ‘주여 삼창’입니다. <br/>“주여, 주여, 주여!” 세 번을 반복하여 부르짖는 것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이며, 오직 주의 응답만을 고대한다는 전심의 표현입니다. <br/>성경에서 이처럼 절박한 부르짖음의 원형을 찾는다면 단연 다니엘의 기도를 꼽을 수 있습니다. <br/>기나긴 포로기의 끝자락에서 이스라엘의 회복을 열망했던 다니엘은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호소합니다:<br/>“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단 9:19). ‘주여’라는 호칭 사이, 사이에 간절한 간구의 내용이 스며있지만, <br/>&#039;오직 주님만 바라보는 그 절박함은 오늘 우리의 ‘주여 삼창’과 깊이 닮아있습니다. <br/><br/>&nbsp; &nbsp;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성경의 또 다른 ‘삼창’이 있습니다. <br/>안타깝게도 이러한 상황을 유발한 근본 원인이 된 하나님이 외면하셨던 ‘거짓 삼창’이었습니다. <br/>유다가 파멸의 길로 치닫던 시절, 예레미야 선지자가 성전 문 앞에 서서 하나님의 마음을 대변하며 눈물로 외쳤던 말씀입니다: <br/>“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 곳에 살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여호와의 성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렘 7:3-4). <br/>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의 현장에서는 온갖 불의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면서도, 성전 문을 들어서며 “여호와의 성전이라!”를 반복하여 세 번 외쳤습니다. <br/>성전이 여기 있으니 자신들은 안전할 것이라는 영적 불감증, 그리고 종교적 주문과도 같은 거짓 안도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br/>입술의 외침이 안전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삶의 길과 행위를 바르게 고치는 것만이 살길이라고 말입니다. <br/><br/>&nbsp; &nbsp;  그 길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br/>사람이 조작해 낸 ‘거짓된 삼창’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생명의 삼창’으로 돌아서야 합니다. <br/>웃시야 왕이 죽던 해, 이사야 선지자가 천상 성전에서 보았던 영광스러운 장면입니다: <br/>“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사 6:3). <br/>스랍(천사)들이 밤낮 쉬지 않고 외치던 ‘거룩의 삼창’이 고동치는 천상 예배는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날까지 이어진다는 점에서(계 4:8), 우리가 회복해야 할 본질임을 알 수 있습니다. <br/>그리고 이 ‘거룩의 삼창’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지켜야 할 예배자의 삶이라는 것도 분명해집니다. <br/><br/>&nbsp; &nbsp;  성경이 말하는 거룩은 저 멀리 구름 위에 있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br/>구약과 신약이 동일하게 증언하듯, 거룩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온전히 따라 살아가는 ‘실천’입니다(민 15:40; 요 17:17-19). <br/>그러므로 골방과 성전에서 “주여!”를 거듭 외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진리의 말씀을 따라 살아내는 삶의 책임이 따릅니다. <br/>행함이 없는 부르짖음을 향해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엄히 물으십니다: <br/>“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내가 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느냐”(눅 6:46).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br/>&nbsp;반드시 주의 말씀 앞에 자신의 삶을 꺾어 “아멘”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우리의 기도가 뜨거운 부르짖음에만 머물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br/>예배당 문을 나서는 순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반응하는 삶이 시작되어야 합니다. <br/>그때 비로소 기도의 자리에서 부르짖은 “주여, 주여, 주여!”의 간절함은 삶의 현장에서 피어나는 “아멘, 아멘, 아멘!”의 신실한 순종으로 완성될 것입니다. <br/>그리고 ‘주여 삼창’은 ‘아멘 삼창’과 만나 마침내 ‘거룩 삼창’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29 May 2026 16:15:2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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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꿈이 주인을 찾을 때 끼지</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꿈(dream)’이라는 단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됩니다. 하나는 수면 중에 겪는 심리적 현상이고, 다른 하나는 실현하고 싶은 희망이나 이상입니다. <br/>드물기는 하지만 때로는 이 두 가지가 맞닿는 경우도 있습니다. 잠을 자며 꿈을 꾸는데 그 꿈이 하늘로부터 온 특별한 메시지를 품고 있는 경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br/>물론 그 구별을 위해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br/><br/>&nbsp; &nbsp;  성경에서 꿈 이야기가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곳은 단연 창세기입니다. 아브라함, 아비멜렉, 야곱, 라반, 그리고 요셉이 하나님의 계시가 담긴 꿈을 꾼 대표적인 인물들입니다. <br/>그런데 이들 중 오직 요셉만이 다른 이들과 구별되는 아주 독특한 종류의 꿈을 거듭하여 꿉니다. <br/>요셉 외에 다른 사람들의 꿈에는 하나님이나 천사가 직접 나타나 해야 할 일을 명확하게 지시하십니다. <br/>꿈속이지만 분명한 음성과 지시가 주어지기에, 그리 큰 분별력이 필요하지 않은 꿈들이었습니다.<br/><br/>&nbsp; &nbsp;  그러나 요셉의 꿈은 결이 다릅니다. 하나님이나 사자가 직접 나타나지 않고, 오직 상징만 주어져 반드시 ‘해석’해야 하는 종류의 꿈입니다. <br/>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밤마다 꾸는 꿈과 그 형태가 유사합니다. 이처럼 바른 해석을 요구하는 꿈들은 자칫 여러 가지 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합니다. <br/>성경에는 꿈을 구실로 다른 신을 따르게 하는 꿈꾸는 자들(신 13:1-3), 자기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는 거짓 선지자들(렘 23:25-26), <br/>그리고 헛된 위로로 백성을 방황하게 하는 복술자들이 있었습니다(슥 10:2).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이와 유사한 혼란은 여전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br/><br/>&nbsp; &nbsp;  이러한 혼란이 발생하는 이유는, 꿈이 아직 ‘본래의 주인’을 찾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형태는 다르지만 의미는 동일한 꿈을 겹쳐 꾸었습니다. <br/>형들의 곡식 단이 자신의 단을 향해 절하는 꿈, 그리고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자신을 향해 절하는 꿈이었습니다. <br/>이 꿈은 요셉에게는 최고가 된다는 우쭐함을 주었고, 형들의 해석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br/>“네가 참으로 우리의 왕이 되겠느냐 참으로 우리를 다스리게 되겠느냐”(창 37:8). <br/>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가치관에 갇힌 해석일 뿐이었습니다.<br/><br/>&nbsp; &nbsp;  요셉과 형제들은 즉각적으로 해몽을 내렸지만, 그 속에 담긴 진짜 의미는 깨닫지 못했습니다. <br/>하나님께서 주시는 꿈은 결코 권력을 휘둘러 누군가를 억압하거나 지배하기 위해 주어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br/>그러므로 꿈을 꾼 자도, 그 이야기를 듣는 자도 인간의 선입견으로 말하고 들어서는 안 됩니다. <br/>반드시 ‘하나님의 눈’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 꿈의 시작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nbsp;  그렇기에 우리에게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꾼 꿈이지만, 그 꿈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꿈’으로 수용해 가는 성숙의 과정 말입니다. <br/>요셉이 인생의 가장 낮아진 자리인 종살이와 감옥이라는 광야에서 배워야 했던 성숙은 왕좌에 버금가는 최고가 되는 꿈이 ‘지배의 다스림’이 아니라<br/>‘많은 사람의 생명을 살리기 위한 섬김의 자리’임을 깨닫는 것이었습니다. <br/>마찬가지로 형제들이 모진 질곡의 시간 속에서 배워야 했던 성숙은 누군가 자신보다 높아질 때 그 자리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br/>모두를 살리는 ‘축복의 통로’임을 인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영적인 성숙은 시련의 시간을 통과한 후 꿈이 비로소 본래의 주인인 ‘하나님’을 찾을 때 일어나는 아름다운 기적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29 May 2026 15:42:0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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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랑은 코끼리도 말하게 합니다</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어느 날 우연히 에버랜드의 ‘말하는 코끼리 코식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br/>&nbsp;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코끼리가 말을 한다고? 코로 내는 바람 소리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습니다. <br/>하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검색해 본 영상 속 코식이는, 누가 들어도 선명한 발음으로 “좋아”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br/>그 외에도 6~7개의 단어를 더 구사한다는 사실이 놀라움으로 다가왔습니다. <br/>생태학적으로 구강과 혀의 구조상 코끼리는 사람의 말소리를 흉내 내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nbsp;  이 믿기 어려운 소식은 국내외 언론은 물론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습니다. <br/>2010년, 독일의 다니엘 미첸 박사와 오스트리아의 음성 의사소통 전문가 안젤라 스토거-호워드 박사가 에버랜드를 방문해 정밀 연구를 진행했습니다. <br/>연구의 핵심은 다른 종에게는 형태학적으로 불가능한 ‘언어 모방 능력’이 코식이에게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증명하는 것이었습니다. <br/>수개월의 연구 끝에 밝혀진 원리는 놀라웠습니다. <br/>코식이는 입 자체로 소리를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손가락을 입에 넣어 휘파람을 부는 것과 유사한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br/>입김을 뿜어냄과 동시에 코를 입안에 넣어 적절하게 흔들며 공기 흐름을 조절함으로써 사람의 목소리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br/>학계는 이를 오랜 시간 공들인 ‘각고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라고 결론지었습니다. <br/>이 연구 결과는 세계적 권위의 학술지 ‘커런트 바이올로지(Current Biology)’에 게재되며 전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br/><br/>&nbsp; &nbsp;  하지만 저에게 논문의 분석 결과에서 더 큰 울림을 주었던 것은 코식이가 불가능에 가까운 말을 한 것보다 그 말을 하게 된 ‘이유’였습니다. <br/>그것은 1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자신을 돌봐준 사육사의 모든 것을 닮고 싶어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br/>사육사가 내는 목소리마저 닮고 싶어 했던 그 간절함이 불가능의 벽을 허물게 했던 것입니다.<br/><br/>&nbsp; &nbsp; 코식이는 1990년 어린이대공원에서 태어나 3년 뒤 낯선 에버랜드로 옮겨졌음에도 외로움과 고립감을 이겨낼 수 있었던 비결은 김종갑 사육사의 헌신이었습니다. <br/>김 사육사는 퇴근까지 마다하며 코식이 곁에서 잠을 잤고,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코식이를 쓰다듬으며 “코식아 사랑해,” “코식아 좋아?”라고 늘 속삭였습니다. <br/>그 변함없는 사랑에 코식이는 어느 날 “좋아”라는 말로 응답했습니다. <br/>음성 분석 결과 코식이의 소리는 아시아 코끼리가 내는 194개의 울음소리와 매우 다른 주파수를 사용하며, 김 사육사의 주파수와 거의 일치하는 닮음꼴이었습니다. <br/><br/>&nbsp; &nbsp; 미물이라 여길 수 있는 코끼리조차 사랑의 힘으로 종의 한계를 뛰어넘는 응답을 합니다. <br/>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과 임마누엘의 사랑은 코식이가 받은 그 사랑에 비할 수 없이 깊고, 높으며, 측량할 길 없이 광대합니다. <br/>사도 바울은 사망도, 생명도,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음을 불변의 현재형으로 우리에게 선포하고 있습니다(롬 8:38-39). <br/>지금도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우리도 “좋아”라고 응답하길 원합니다. <br/>비록 그 과정이 지난한 훈련일지라도, 예수님의 목소리에 우리의 주파수를 맞추며 주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삶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br/><br/>김 재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29 May 2026 15:39:1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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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어떤 마음이십니까?</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열심히 사명을 감당하는 성도들을 이따금 당혹스럽게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의무감으로 하십니까, 아니면 기쁨으로 하십니까?”라는 물음입니다. <br/>사실 사명을 감당하는 데 있어 의무감은 필수적인 요소입니다. <br/>소명은 감정이 기쁘면 하고 힘들면 내팽개칠 수 있는 가벼운 것이 아니기에, 책임감이라는 단단한 균형추가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br/>이 질문은 “율법이냐, 복음이냐?”를 가르는 신학적 질문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br/>그러나 이 둘은 서로를 밀어내는 상극이 아니라, 바른 순서 안에서 적정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br/>율법은 복음을 향해 나아가야 하고, 복음은 율법을 기꺼이 품어 안아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의무감이 과중해지면 ‘탈진’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오기에, <br/>복음이 주는 기쁨과 조율하는 과정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신앙인의 삶은 건강해집니다. <br/><br/>&nbsp;  무와 기쁨이 만나고 율법과 복음이 입 맞추는 길을 잘 보여주는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br/>차덕윤 목사의 저서 『내 안에 하나님이 있는가』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폭군 같은 첫 번째 남편과 30년을 살다 사별한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br/>첫 남편은 출근할 때 다정한 포옹 대신, 아내가 그날 마쳐야 할 일들을 적은 쪽지를 건넸습니다. <br/>목록 중 하나라도 완수하지 못하면 남편은 폭군으로 변해 폭언과 폭력을 휘둘렀습니다. <br/>여인은 남편이 돌아오기 전 임무를 마치려 필사적으로 움직였고, 매일 녹초가 된 채 감옥 같은 삶을 견뎌야 했습니다. <br/>세월이 흘러 남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몇 년 후 여인은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고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 재혼하게 됩니다. <br/>과거의 상처를 잊을 만큼 행복한 나날이었습니다. 매일 신나게 집안일을 하고 기쁨으로 요리를 하는, 그야말로 천국 같은 삶이었습니다.<br/><br/>&nbsp; &nbsp; 전 남편과 살던 집에서 새살림을 꾸렸던 어느 날, 여인은 소파 쿠션 사이에서 구겨진 종이쪽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br/>30년 동안 인생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전 남편의 지시사항이 적힌 쪽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항목들을 하나하나 읽어 내려가던 여인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습니다. <br/>지금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하는 일들이, 과거 그토록 지겨웠던 의무사항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여인은 미련 없이 쪽지를 찢어 버리며 이렇게 말합니다: <br/>“나는 지금 여기 적힌 것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하고 있어. 이런 목록 따위가 없어도 말이야.”<br/><br/>&nbsp;  이 이야기는 사명을 감당할 때 “의무냐 기쁨이냐, 율법이냐 복음이냐”라는 질문조차 필요 없게 만드는 길을 보여줍니다. <br/>그것은 바로 ‘저절로 우러나오는 사랑’입니다. 진심 어린 사랑을 받으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더 힘든 일을 하면서도 힘든 줄 모릅니다. <br/>의무를 넘어 기쁨과 행복의 천국을 사는 것입니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어떤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입니다. <br/>지금 내가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고 있는가가 본질입니다. 혹시 지금 맡겨진 사명이 무겁게만 느껴지십니까? <br/>“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롬 8:32)라는 그 크신 사랑을 기억하십시오. <br/>그 사랑 안에서 다시 힘을 얻고 소명 속에 숨겨진 진정한 기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Sat, 09 May 2026 15:33:3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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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주님, 사랑을 부어주십시오</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야곱의 생애를 묵상하다 보면 기다리지 못하는 조급함이 낳은 안타까운 결과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br/>야곱은 이미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주인공이었고, 어머니 리브가는 그 약속을 직접 귀로 들었습니다. <br/>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으며, 조급함에 쫓겨 인간적인 방법으로 시간을 단축하려 하는 심각한 우를 범합니다. <br/>그리고 그들의 선택은, 결국 가족 모두가 뿔뿔이 흩어지는 비극으로 귀결되었습니다.<br/><br/>&nbsp; &nbsp; 그런데 이 야곱의 파란만장한 이야기 한복판에, 조급함이 사라지고 인내로 잠잠히 기다리는 법을 보여주는 아름다운 ‘단막극’ 하나가 삽입되어 있습니다. <br/>자신의 때를 앞당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야곱이, 기쁨으로 긴 세월을 견뎌내는 이 장면은 어쩌면 하나님의 거룩한 해학일지도 모릅니다. <br/>하나님께서는 이 장면을 통해 야곱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렇게 질문하시는 듯합니다.<br/>&nbsp;“보아라, 너도 이렇게 기쁘게 기다릴 수 있지 않느냐?”: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br/>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야밈 아하딤) 같이 여겼더라”(창 29:20). <br/>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즉시 손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야곱에게 그 칠 년은 결코 짧은 시간이 아닐 것입니다. <br/>그런데 거친 양치기 일과 고된 집안일을 수행해야 하는 고통스러운 노동의 시간이었을 것이 분명함에도 <br/>야곱에게 그 칠 년은 어깨춤이 절로 나오는 축제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br/><br/>&nbsp; &nbsp; 하지만 이와 정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야곱에게 두 번이나 뒤통수를 맞은 형 에서의 시간입니다. <br/>리브가는 야곱을 밧단 아람으로 피신시키며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야밈 아하딤)만 머물라”고 당부했습니다(창 27:44). <br/>리브가는 그 시간이 금방 지나갈 것이라 오해했지만, 한 맺힌 에서에게는 서슬 퍼런 분노의 세월이었으며, <br/>야곱에게는 20년이 흐른 뒤에도 형의 곁으로 가는 것조차 두려운 시간이었습니다. <br/>기나긴 세월도 분노와 두려움이 뒤얽힌 악감정을 용해시키지 못했고, 짧아야 할 &#039;며칠&#039;은 기약 없는 고통의 시간이 되어 버렸습니다. <br/><br/>&nbsp; &nbsp; 이 두 상황은 선명한 진리를 보여주는데 “사랑은 시간을 압축시키지만, 분노와 두려움은 시간을 한없이 늘려버린다”는 사실입니다. <br/>그러므로 얽힌 문제를 푸는 유일한 열쇠는 바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어떻게 가능할까요? 답은 야곱의 이야기 속에 숨어 있습니다. <br/>사랑은 야곱이 스스로 짜낸 감정이 아니라 라헬이라는 존재를 통해 그의 마음속에 저절로 ‘부어진’ 것입니다. <br/>그럼 악감정의 골을 가진 두 사람이 공통으로 사랑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그들을 동일하게 사랑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며칠의 기적’은 언제나 일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br/><br/>&nbsp; &nbsp; 성경은 선포합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5). <br/>그러할 때 우리 삶에는 성령의 열매가 맺히기 시작합니다. <br/>그 첫 번째 열매가 바로 &#039;사랑&#039;이며, 그 사랑이 ‘오래 참음’으로 시작된다는 것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br/>오래 참는다는 것은 시간을 견디는 강한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단순히 기다리며 견디게 하는 힘을 넘어, 그 기다림의 과정조차 기쁨으로 바꾸는 능력이 됩니다.<br/><br/>&nbsp; &nbsp; 야곱도, 우리도 기다리지 못하고 조급한 이유는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계속해서 공급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br/>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기도는 바뀌어야 합니다. “주님, 제게 참을 수 있는 인내를 주십시오”가 아니라, “주님, 제 안에 당신의 사랑을 충만히 부어 주십시오.” <br/>그 사랑이 오면, 기다림은 축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Sat, 09 May 2026 15:19:59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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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칼인가, 약인가?: 입술에 담긴 생명의 선택</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우리는 하루에도 수많은 말을 쏟아내며 살아갑니다. 기력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내뱉을 수 있는 것이 말입니다. <br/>마음 맞는 이들을 만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합니다. <br/>그러나 정작 우리가 나누는 대화가 ‘긍정’과 ‘부정’이라는 두 극단 중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깊이 의식하며 입술을 여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아 보입니다.<br/><br/>&nbsp;  가족 치료의 권위자인 존 가트맨(John Gottman) 박사는 700쌍의 부부를 10년간 추적 조사하여 놀라운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br/>부부의 이혼 여부를 결정짓는 핵심이 바로 대화 속 ‘칭찬과 비난의 비율’에 있다는 것입니다. <br/>칭찬과 비난이 5:1 이상의 비율을 유지하는 부부는 건강한 가정을 지켜냈지만, 그 미만인 부부들은 대부분 불행한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br/>가트맨 박사는 이 연구를 좀 더 발전시켜 이후에는 3,000쌍의 부부를 대상으로 유사한 연구를 진행했는데, <br/>이때는 단 한 시간의 대화로 5년 이내 헤어질 것에 대한 여부를 97%의 확률로 맞췄다고 합니다. <br/>부부가 무의식적으로 대화 중에 상대방을 경멸하는 표정을 짓는지가 포인트였는데, 연구가 거듭될수록 예측의 정확도는 높아져, <br/>이제는 단 3분간의 대화만으로도 그 관계의 미래가 어떤 결말에 이를지를 95%의 확률로 맞힐 수 있다고 합니다.<br/><br/>&nbsp;  이 통계는 우리에게 엄중한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아주 짧은 시간의 대화, <br/>혹은 무심코 지은 표정 하나가 사람 사이를 영원히 갈라놓는 예리한 칼날이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br/>지혜의 보고인 잠언이 왜 그토록 입술의 제어를 다른 어떤 주제보다도 가장 빈번하게 반복해서 강조하는지 고개가 끄덕여지는 대목입니다. <br/><br/>&nbsp;  하지만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이 연구 결과는 위협적인 ‘적신호’가 아니라 소망의 ‘청신호’가 됩니다. <br/>단 3분의 부정적인 대화가 관계를 무너뜨릴 수 있다면, 역으로 사랑이 담긴 3분의 대화는 무너진 관계를 견고하게 세우고 연합시키는 기적의 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br/>이는 부정적인 통계를 뒤집는 역전의 길이 결코 멀리 있지 않음을 선명하게 보여주기에 희망입니다.<br/>&nbsp;<br/>&nbsp; 말에는 ‘파괴적인 힘’보다 훨씬 강력한 ‘회복의 생명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br/>비록 “칼로 찌름 같이 함부로 말하는 자가 있지만” 그럼에도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과 같으니라”는 말씀 속에 그 희망의 빛이 가득히 들어있습니다(잠 12:18). <br/>이렇게 성경은 함부로 내뱉은 말이 칼이 되어 상처를 입히기도 하지만, 지혜로운 자의 혀는 사람을 살리는 양약이 된다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br/>이는 말이 극심한 상처도 주지만 그 말이 또한 치유하는 능력도 그 이상으로 강력하게 내포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br/>그런데 좋은 약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br/>수많은 임상시험을 거쳐 정교하게 조제되듯, 누군가를 살리는 칭찬과 격려, 축복의 말 역시 훈련과 준비가 필요합니다. <br/>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내 입술을 다스리고, 상대의 아픔에 꼭 맞는 ‘때에 맞는 말’을 의도적으로 선택해야 합니다. <br/><br/>&nbsp;  오늘, 우리의 입술에서 칼을 내려놓기를 원합니다. <br/>대신 성령의 기름 부으심 안에서 정성껏 준비된 ‘약이 되는 말’을 건네봅시다. <br/>때에 맞는 약이 되는 말로 낙심한 영혼을 일으켜 세우고,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며, <br/>우리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롭게 창조해 나가는 복된 하루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Sat, 09 May 2026 15:14:2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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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년초의 방어막을 통해</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잠시 머무는 제주 살이 중 마주한 풍경들은 매일이 새로운 경이로움입니다. <br/>그중에서도 길가에 무심한 듯 자생하는 ‘백년초’는 제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br/>본래 선인장인 백년초는 내륙의 추위를 견디기 어렵지만, 온화한 제주의 해풍을 맞으며 바닷가 근처에 당당히 군락을 이룹니다. <br/>특히 3, 4월이면 자줏빛과 붉은빛으로 탐스럽게 익어가는 그 열매는 지나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매혹적입니다.<br/><br/>&nbsp; 어느 날, 푸른 바다를 곁에 두고 걷다 주렁주렁 매달린 백년초 열매가 하도 신기하여 덥석 하나를 따보았습니다. <br/>그러나 그 짧고 섣부른 호기심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이틀 내내 후회와 통증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br/>열매 표면에 촘촘히 박힌 미세한 잔가시들이 그렇게 성가시고 집요하게 저를 괴롭힐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br/>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시들이 손가락 끝에 박혀, 무언가를 만질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전해졌습니다. <br/>손톱으로 아무리 뽑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가시와 씨름하며 스스로의 무지함에 짜증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br/>다행히 테이프를 이용해 가시를 제거하라는 인터넷 상식 덕분에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br/><br/>&nbsp; &nbsp; 고통이 잦아들자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 미세한 가시들이야말로 백년초가 가진 ‘최고의 방어막’이었다는 사실입니다. <br/>만약 어떤 동물이 멋모르고 이 열매를 먹었다가 입안 가득 가시가 박히는 치명적인 경험을 한다면, 다시는 이 열매에 접근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br/>그것은 하나님께서 연약한 식물에게 허락하신 천연 방어막이자, 종(種)의 번성을 위해 예비하신 생존의 지혜였습니다. <br/>이 묵상은 자연스레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미미한 식물조차 천적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br/>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039;영적 방어막&#039;을 주셨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건드리는 순간, <br/>오히려 사탄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혼비백산하여 물러나게 만드는 우리 안의 ‘영적 잔가시’는 무엇일까요?<br/><br/>&nbsp; &nbsp;  첫째는 &#039;말씀에 대한 순종&#039;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세상의 눈에 보잘것없는 잔가시처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br/>그러나 그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순종의 순간, 잔가시는 좌우에 날 선 예리한 ‘성령의 검’으로 변합니다. <br/>이 검은 한 길로 공격해온 대적을 일곱 길로 도망치게 만드는 강력한 권능이 됩니다(신 28:7). <br/>둘째는 &#039;기도&#039;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를 건드리는 것은 곧 하늘 보좌를 건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br/>성도의 작은 신음과 기도는 하나님의 개입을 불러일으키며, 일순간에 사탄의 왕국을 뒤흔드는 우레와 번개, 그리고 지진이 됩니다(계 8:5). <br/>기도하는 한 사람을 건드릴 때 무너지는 것은 성도가 아니라 사탄의 진영뿐입니다. <br/>셋째는 &#039;성령의 내주하심&#039;입니다. 이는 이 모든 방어막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br/>사탄이 보기에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가시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 성도일지 모르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를 말씀과 기도로 무장한 ‘영적 전사’로 빚어내십니다. <br/>결국 사탄의 공격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연단시킬 뿐이며, 전쟁의 끝은 언제나 하나님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br/><br/>&nbsp; 백년초 열매가 미세한 가시로 자신을 지켜내듯, 성도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말씀 순종’과 ‘기도’라는 최고의 방어막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br/>오늘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신뢰하며,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히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17 Apr 2026 17:34:3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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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랑의 낭비</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값비싼 향유 옥합을 기꺼이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인의 이야기는 사복음서 전체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br/>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 그 가격이 삼백 데나리온이면 거의 노동자 한 명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니 결코 적지 않습니다. <br/>이를 목격한 제자들은 분개하며 명백한 ‘허비’라고 질타를 가합니다(마 26:8). <br/>‘허비’라고 번역된 ‘아폴레이아’는 대부분 ‘심판으로 인한 파괴와 멸망’(마 7:13; 벧후 2:1; 계 17:8)으로 번역되는 다소 과격한 용어입니다. <br/>이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제자들의 눈에는 일순간에 거액의 돈이 철저히 파멸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br/><br/>&nbsp; &nbsp;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십니다. <br/>성찬식이 주님을 기억케 한다면 이 명령은 이 여인의 섬김을 기억케 합니다. 이보다 더한 칭찬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br/>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하였다는 모세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은 다윗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br/>도대체 무엇이 이 여인을 이렇게까지 칭찬하시는 이유일까요? 답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br/><br/>&nbsp; &nbsp;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고 하십니다. <br/>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까지 무리를 향하여, 제자들을 향하여 거듭, 거듭 말씀하신 것은 고난 당하심과 죽임 당하심 그리고 삼 일만에 살아나실 것이었습니다. <br/>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일까요? 불변의 복음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br/>“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br/>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br/><br/>&nbsp; &nbsp;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자신을 다 깨뜨리는 심판을 통해 멸망으로 나아가시려는 것입니다. <br/>예수님께서 자신을 파괴하시는 이 죽음은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대급 낭비인 것입니다. <br/>여기 향유를 깨뜨려 ‘허비’한 행동은, 인류의 ‘멸망(아폴레이아)’을 짊어지기 위해 스스로를 깨뜨리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고합니다. <br/>제자들은 물질의 경제적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멸망’이라 보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란 멸망을 통해 인류를 ‘심판의 멸망’에서 구원하는 ‘거룩한 경제학’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br/>그러니 감히 누가 예수님의 이 죽음 앞에서 자신의 것을 다 깨뜨려 드리는 것을 낭비라고 질책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파멸이 아닌 ‘사랑의 낭비’인 것입니다. <br/><br/>&nbsp; &nbsp;  이 여인의 헌신이 ‘사랑의 낭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대상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가장 위대한 사랑의 낭비’를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br/>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피조물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비경제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br/>제자들은 계산기를 두드렸으나 여인은 자신의 심판을 대신하여 멸망을 짊어지시는 주를 향하여 심장을 드렸습니다. <br/>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행하신 최고의 낭비인 십자가 덕분에 우리가 값을 계산할 수 없는 영생이라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br/>이렇게 주님의 우리를 위한 성찬의 깨어짐과 우리의 주님을 위한 옥합의 깨어짐이 만나는 곳에 사랑이 완성됩니다. <br/>그러므로 신앙이란 효율성을 따지는 ‘계산’이 아니라, 나를 위해 전부를 허비하신 그리스도께 나의 전부를 쏟아붓는 ‘사랑의 낭비’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Sat, 11 Apr 2026 14:20:5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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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참 ‘캐셔로’ – 비움으로 채워지는 부활의 신비</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요근래에 방영된 ‘캐셔로’라는 독특한 제목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br/>‘현금’을 뜻하는 ‘캐쉬(Cash)’와 ‘영웅’이란 단어 ‘히어로(Hero)’가 합쳐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몸에 현금을 지니고 있어야만 초능력이 발휘되는 ‘현금 영웅’입니다. <br/>그래서 ‘캐셔로’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능력을 쓸 때마다 지니고 있던 돈이 소모되고, 액수가 많을수록 능력도 강해진다는 설정입니다. <br/>만약 돈이 아까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면 몸에 고통스러운 피부병이 생기고, 반대로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 도와주고 나면 씻은 듯이 낫는 숙명을 지녔습니다.<br/>&nbsp; 극 초반, 주인공은 자신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이 두려워 무거운 짐을 든 노인이나 폭력을 당하는 이웃을 못 본체 지나칩니다. <br/>이런 자신에게 스스로 위로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히어로들도 만약 자신의 재산이 사라진다고 하면 쉽게 나서지 못할 거야”라는 독백입니다. <br/>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능력을 아낄수록 주변 사람들은 떠나가고 삶은 피폐해집니다. <br/>반면, 자신의 것을 다 내어 능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사람들이 모여들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br/><br/>&nbsp; &nbsp;  이 드라마의 내용이 문득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특히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br/>우리 역시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키라는 소명과 함께, 세상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성령의 임재라는 ‘초-초능력’을 값없이 부여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br/>하지만 우리의 이 놀라운 능력은 종종 극도로 제한되곤 합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생명’을 잃지 않으려 그 능력을 스스로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br/>내가 소모되는 것이 두려워 영적 능력을 사장시킬 때 우리 영혼과 사회에는 육체적, 사회적인 질병이 만연하고, 공동체의 연합은 깨지며, <br/>악과 불의, 불평등이 팽배한 세상이 더욱 확대되는 현상이 지속될 것입니다(롬 1:18-32). <br/><br/>&nbsp; &nbsp;  이번 부활절 ‘참 캐셔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 <br/>주님은 하늘의 영광이라는 ‘비용’을 다 지불하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과 피, 생명이라는 전 재산을 우리를 위해 완전히 소모하셨습니다. <br/>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완벽한 ‘소비’이자 ‘상실’이었으며, ‘히어로’가 아닌 ‘루저’였습니다. <br/>그러나 하나님은 그 비움을 통해 ‘부활’이라는 인류 최대의 초능력을 일으키셨습니다. <br/>주님이 자신을 다 내어주셨을 때 죽음의 권세는 깨어졌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br/><br/>&nbsp; &nbsp;  부활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나를 소모하며’ 살아갈 때 재현되는 현재 진행형의 역사입니다. <br/>우리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용납할 때”(엡 4:2), 그리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될 때”(딤전 6:18), <br/>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부활의 능력이 깨어납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br/>우리에게 주신 건강, 재능, 물질, 생명까지도 나를 위해 쌓아두라고 주신 예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소모하라고 맡겨주신 ‘부활의 도구’라는 점입니다.<br/><br/>&nbsp; &nbsp;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신비야말로 부활의 참된 의미입니다. <br/>이번 부활절, 내 것을 아끼는 ‘방어적 삶’에서 벗어나, 주님처럼 나를 기꺼이 소모하여 이웃을 살리는 ‘참 캐셔로’의 삶을 시작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br/>다른 이의 아픔을 채우려 비워낸 자리마다 무덤을 이기고 피어난 부활의 생명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Sat, 11 Apr 2026 13:51:50 +0900</dc:date>
</i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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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순절 - 우리를 깨우치는 하나님의 모략</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절의 기간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시 새롭게 빚어가는 소중한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 기간은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잊고 살았던 은혜를 기억하며, 무뎌진 사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039;회복의 기회&#039;이기 때문입니다. 성과와 결과만을 재촉하는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 하루하루 과정을 소중히 여기며 세상 속에서 희석되었던 일상의 영성을 되찾아 가는 40일의 과정 그 끝에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과 하나가 되고, 우리 곁에 와 계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회복하게 됩니다. <br/>&nbsp; 그런데 이 ‘회복’은 왜 우리에게 그토록 절실할까요? 군대의 지침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 나폴레옹의 말이냐, 맥아더의 말이냐라는 출처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준엄한 교훈입니다. 전쟁터에서 작전은 예상치 못한 변수나 천재지변으로 인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039;경계&#039;는 다릅니다. 늘 깨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을 살피는 것은 지휘관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방심과 안일함, 습관적인 태만이 부대 전체를 위태롭게 하듯, 영적인 경계의 실패 또한 우리 영혼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br/>&nbsp; ‘작전 실패’와 ‘경계 실패’를 신앙에 비유하면 ‘작전 실패’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기도로 준비하며 어떤 사역을 계획했지만 열매가 적거나, 기대만큼 되지 않은 것 그리고 열심히 했는데도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결과가 보잘것없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비록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최선을 다 했음으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내와 겸손,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법을 배우는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경계 실패’는 훨씬 엄중한 문제입니다. 음란과 탐욕, 명예욕과 같은 죄의 유혹이 문턱까지 와 있음을 알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경고와 양심의 울림을 반복해서 무시할 때 영적 긴장은 서서히 풀리고, 결국 나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교회 공동체, 나아가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래서 훨씬 더 무겁고 엄중한 문제입니다.<br/>&nbsp; 우리는 세상의 거친 위력 앞에 늘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때로는 작전에 실패하고, 때로는 경계에 무너지며 좌절합니다. 그런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려고 주님은 우리에게 오셨고, 기꺼이 십자가로 가시며, 거듭 또 다른 보혜사로 신속히 오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기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얻으리라 하십니다(요 15:7). 이는 곧 어떤 작전을 세우든 주의 뜻을 이루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그 결과가 아버지의 영광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족하지 않게 매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시며 경계를 성공적으로 이끄시어 세상 끝날까지 깨어 있는 주의 제자로 이끄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요 16:1, 8). 이러한 삶의 회복을 위해 보혜사 성령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절은 우리를 사랑의 열매로 이끄시는 &#039;작전의 승리&#039;이자, 매일의 삶을 지키시는 &#039;경계의 성공&#039;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모략입니다. 이 거룩한 여정을 통해 우리 모두가 성령과 함께하는 진정한 회복의 기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4:3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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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영실을 지나 사려니 숲을 거쳐 한라까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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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제주 살이를 하며 길을 나서면, 예사롭지 않은 이름이 적힌 이정표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섬 특유의 낯선 지명이겠거니 하며 가벼이 넘겼지만, 같은 길을 반복해 오가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추적하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제주 사람들의 간절한 신심(信心)이 오롯이 새겨진 신앙의 고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중에서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영실(靈室)’ 계곡과 ‘사려니 숲’은 제 마음을 깊은 묵상으로 이끌었습니다.<br/>&nbsp; 먼저 ‘한라산(漢拏山)’의 의미를 새롭게 마음에 담아봅니다. 제주의 중심에 우뚝 서서 어디서나 바라보이는 이 산의 이름에서 ‘한(漢)’은 은하수를, ‘라(拏)’는 붙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손을 뻗으면 능히 은하수를 붙잡을 수 있을 만큼 높은 산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한 지리적 높이를 넘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신성한 통로라는 영적인 갈망이 서려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신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날마다 영적인 한라산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임을 느낍니다. 이 사순절의 시기에 ‘영실’과 ‘사려니’를 지나 ‘한라’로 향하는 길은,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br/>&nbsp; ‘영실’은 한라산 남서쪽으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골짜기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그 골짜기는 형형색색의 수많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탓에 ‘영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거처’라 하여 ‘영실(靈室)’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산의 정상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이 깊은 골짜기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영적 교훈을 줍니다. 비록 낮고 험한 골짜기일지라도, 그곳이 곧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지성소가 된다는 확신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겪는 낮아짐의 고난이 오히려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고난의 깊이가 곧 믿음의 높이가 되는 역설의 장소, 그곳이 바로 ‘영실’입니다. 우리의 시련과 환난은 머물러야 할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를 ‘성령의 거처(靈室)’인 견고한 반석으로 빚어내어 그 산으로 이끄시는 거룩한 과정인 것입니다. <br/>&nbsp; 그 골짜기를 지나 이제 ‘사려니 숲’길을 걷습니다. ‘사려니’는 제주 방언으로 ‘살안이’ 혹은 ‘살안길’이라 하여, ‘사람이 살며 조심히 다녀야 하는 거룩한 기운이 감도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저 아름다운 숲이 아니라 신의 숨결이 깃든 곳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경외의 장소인 셈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출 3:5)” 하신 말씀이 이 길 위에서 새롭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 앞(Coram Deo)에서 얼마나 조심스럽고도 경건한 경외함으로 채워져야 하는지를 이 숲길은 묻고 있습니다.<br/>&nbsp; 제주 곳곳에 이토록 신령한 지명이 많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신을 향한 본능적인 염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순절은, 그 모든 염원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인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제 물리적인 한라산에 오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러 오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한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낮고 천한 곳까지 내려오신 주님을 영접한 삶이 곧 ‘영실’이요, 그 주님과 동행하며 걷는 모든 일상이 곧 ‘사려니 숲’이 됩니다. 이번 사순절, 주님을 따르기로 새롭게 결단하는 우리를 통해 제주의 모든 지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되기를, 그리하여 이 땅 가득 주님의 영광이 머물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3:4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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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반석' 위에 '외돌개'로</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제주도 서귀포 앞바다를 두르는 7번 올레길 선상의 바다에는 ‘외돌개’라 이름 붙여진 유명한 바위기둥이 있습니다. 높이는 20여 미터에 이르고, 폭은 7-10미터 정도로 화산이 폭발하여 분출된 용암이 긴 시간 파도의 침식으로 바다 위에 우뚝 솟아 현재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2011년 6월 30일에는 우리나라 명승 제79호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외돌개’라는 이름은 덩그러니 육지와 거리를 두고 밖에 떨어져 있기에 바깥을 의미하는 한자의 ‘외’(外) 자와 바위를 의미하는 우리 말 ‘돌’ 그리고 바다로 튀어나온 절벽이나, 곶을 뜻하는 제주 방언 ‘개’가 합하여져서 이루어진 이름으로 ‘바다 가운데 홀로 떨어져 서 있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올레길이 있는 해안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에 혼자 우뚝 서 있는 큰 바위기둥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입니다. 마침 머무는 숙소의 앞쪽에 이 올레길이 있어 아침 산책을 할 때마다 인상 깊게 보게 되었습니다.<br/>&nbsp; 볼 때마다 어떻게 저 바위기둥이 그렇게 기나긴 세월 동안 파도와 폭풍우를 견디며 저렇게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바다 가운데 홀로 떨어져 서 있는 바위’라면 결코 지금처럼 저렇게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며 벌써 쓰러졌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사실 그 돌기둥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돌기둥 아래에는 단단한 기반 암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파도가 밀려와도 그 바위는 무너지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든든한 반석에 연결되어 서 있기 때문입니다. <br/>&nbsp;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흡사 세상 속에서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홀로 선 존재 시몬이라는 이름으로는 결코 그러한 세상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시몬이라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은 세상의 파도가 한 번만 거세게 휘몰아쳐와도 흔들리는 인생일 뿐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생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설 때 그는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됩니다. 시몬이 단단한 외돌개 같은 바위기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스스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닌 진정한 반석이시며, 머릿돌 되신 예수님께 연결되었기에 세상을 능히 이기는 존재가 되며, 마침내는 음부, 즉 하데스라는 지옥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br/>&nbsp;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 가운데 서 있는 존재들입니다. 파도가 밀려오고, 폭풍우가 휘몰아칩니다. 이 상황이 호전되고, 좋아져서 더 이상 파도도, 폭풍우도 없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위기둥이라는 베드로로 세우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바다에 파도가 없다면 바다가 아니듯이 이 세상에 풍파가 없다면 이미 세상이 아닐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강타할 것입니다. 그 ‘권세’라는 말이 ‘대문’이라는 단어라는 점에서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를 지옥의 문으로 끌어넣으려고 땀이 피가 되도록 애쓸 것입니다. 아무리 거센 파도와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외돌개가 쓰러지지 않는 것이 기반 암석에 든든하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듯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탄이 아무리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도록 피와 물을 다 쏟아주시어 마침내 예수님 안에 고정시켜 주셨습니다. 이제는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 그 날에 그 생각조차 소멸되는 인생을 의지함이 아닌(시 146:4), 진정한 반석이시며, 우리의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외돌개로 다시 서야 합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3:0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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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철 열매 같던 우리를</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하나님의 은혜와 온 교회 성도님들의 배려로 주어진 4개월의 안식년, 그 반환점을 돌 때쯤 드디어 제주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숙소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당당하게 서 있는 소철 나무들이 보이고, 그 곁으로는 한라봉이 주렁주렁 매달린 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바다를 품은 올레길이 나타나니, 이토록 소중한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입니다.<br/>&nbsp; 며칠간 머물며 유독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당 한편의 소철 나무 아래 떨어진, 500원 동전 크기만한 타원형 열매들이었습니다. 평소 식물에 관심이 많던 터라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얇은 막을 벗겨낸 열매는 피칸이나 호두처럼 아주 단단했습니다. 속이 궁금해 발로 깨뜨려 보니 의외로 하얀 분말이 가득했습니다. 호기심에 맛을 보려 하자, 과거 독성 있는 나물을 먹고 고생했던 저를 기억하는 아내가 강력히 만류했습니다.<br/>&nbsp;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소철 열매가 어떤 성분을 가지고 있나를 쳇GPT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답변은 “소철의 열매에는 독성이 있습니다. 특히 ‘사이카신(cycasin)’이라는 독성 물질이 들어있어 날것으로 먹으면 구토, 간 손상, 신경계 이상 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라는 응답이 왔습니다. 아내는 승기를 잡은 듯 의기양양했지만, 제 마음을 흔든 문장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철 열매는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라는 언급이었습니다.<br/>&nbsp; 일본 오키나와 등지에서는 기근이 닥쳤을 때 이 열매를 식량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독을 빼기 위해 물에 여러 번 씻고 오래 담가 발효시키는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치면, 사람을 죽이는 독이 사람을 살리는 귀한 전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이를 말려 통증을 완화하고 혈액순환을 돕는 약재로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br/>&nbsp;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 결코 버려질 영혼이나 포기해야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열매라도 정화와 정성의 시간을 거치면 생명의 양식이 되듯, 그 어떤 완악한 죄인이라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존재가 된다는 진리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br/>&nbsp; 본래 우리는 독성으로 가득한 소철 열매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어 마침내 ‘성령의 열매’로 빚어내시는 주님의 손길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이를 위해 기꺼이 피와 물을 다 쏟아부어 주시는 이 사순절의 사랑이 더욱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남은 안식년의 시간, 생수의 강에 젖어 제 안의 독기는 빠지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만이 가득 차기를 소망해 봅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1: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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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할 정도의 오해를 갖게 만듭니다. 흡사 육체는 의미 없고, 영혼만 중요하다고 여기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헬라 철학의 주장처럼 이 세상의 때가 묻은 더러운 육체는 썩어 없어질 것이나,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을 옹호하는 것처럼 느껴져 혼돈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디에도 사람의 육체는 무의미하며, 영만이 거룩하다라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말씀은 그 자체로 모순이 될 것입니다. 무익한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영광이라는 단어는 물론, 은혜와 진리 또한 결코 함께 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br/>&nbsp;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이 영과 육의 이분법은 무슨 의미를 전하려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문맥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문맥을 벗어난 말씀 해석은 하나님의 의도를 해체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 영과 육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오병이어’라는 또 하나의 표적 이야기 속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의 양식을 공급해 주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려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뒤로하고 단호히 떠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표적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br/>&nbsp; 오병이어 사건이라는 표적은 마침내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며, 그 떡을 먹는 다는 것은 곧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아는 것”으로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는 것은 육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생각, 믿음 없는 차원, 성령 없이 이해하려는 태도로 육체적인 껍질에 얽매인 사고를 뜻하는 것입니다. <br/>&nbsp; 이 영과 육의 구별은 생명을 주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인간적인 계산과 물리적인 이해로는 그 생명을 알 수 없고,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3: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씀을 통해 거듭남의 의미를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난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며, 그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는 의미는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br/>&nbsp;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서는 떠나시지만,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 있으니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믿고 아는 사람들과는 함께하십니다. 이 믿음이 영에 속한 사람임과 이미 영생 안에 사는 사람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제자인 것입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0:3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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