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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남산교회 &amp;gt; 커뮤니티 &amp;gt; 목회단상</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테스트 버전 0.2 (2004-04-26)</description>
<language>ko</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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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백년초의 방어막을 통해</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잠시 머무는 제주 살이 중 마주한 풍경들은 매일이 새로운 경이로움입니다. <br/>그중에서도 길가에 무심한 듯 자생하는 ‘백년초’는 제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br/>본래 선인장인 백년초는 내륙의 추위를 견디기 어렵지만, 온화한 제주의 해풍을 맞으며 바닷가 근처에 당당히 군락을 이룹니다. <br/>특히 3, 4월이면 자줏빛과 붉은빛으로 탐스럽게 익어가는 그 열매는 지나가는 이의 발길을 멈추게 할 만큼 매혹적입니다.<br/><br/>&nbsp; 어느 날, 푸른 바다를 곁에 두고 걷다 주렁주렁 매달린 백년초 열매가 하도 신기하여 덥석 하나를 따보았습니다. <br/>그러나 그 짧고 섣부른 호기심의 대가는 혹독했습니다. 이틀 내내 후회와 통증이 뒤따랐기 때문입니다. <br/>열매 표면에 촘촘히 박힌 미세한 잔가시들이 그렇게 성가시고 집요하게 저를 괴롭힐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br/>눈에 보이지도 않는 가시들이 손가락 끝에 박혀, 무언가를 만질 때마다 찌릿한 통증이 전해졌습니다. <br/>손톱으로 아무리 뽑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가시와 씨름하며 스스로의 무지함에 짜증이 밀려오기도 했습니다. <br/>다행히 테이프를 이용해 가시를 제거하라는 인터넷 상식 덕분에 다음 날이 되어서야 겨우 평범한 일상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br/><br/>&nbsp; &nbsp; 고통이 잦아들자 비로소 깨달음이 찾아왔습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 미세한 가시들이야말로 백년초가 가진 ‘최고의 방어막’이었다는 사실입니다. <br/>만약 어떤 동물이 멋모르고 이 열매를 먹었다가 입안 가득 가시가 박히는 치명적인 경험을 한다면, 다시는 이 열매에 접근조차 하지 못할 것입니다. <br/>그것은 하나님께서 연약한 식물에게 허락하신 천연 방어막이자, 종(種)의 번성을 위해 예비하신 생존의 지혜였습니다. <br/>이 묵상은 자연스레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이어졌습니다. 미미한 식물조차 천적으로부터 보호하시는 하나님께서, <br/>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도 사탄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039;영적 방어막&#039;을 주셨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건드리는 순간, <br/>오히려 사탄 자신이 고통을 당하고 혼비백산하여 물러나게 만드는 우리 안의 ‘영적 잔가시’는 무엇일까요?<br/><br/>&nbsp; &nbsp;  첫째는 &#039;말씀에 대한 순종&#039;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 세상의 눈에 보잘것없는 잔가시처럼 작아 보일 수 있습니다. <br/>그러나 그 말씀 앞에 무릎 꿇는 순종의 순간, 잔가시는 좌우에 날 선 예리한 ‘성령의 검’으로 변합니다. <br/>이 검은 한 길로 공격해온 대적을 일곱 길로 도망치게 만드는 강력한 권능이 됩니다(신 28:7). <br/>둘째는 &#039;기도&#039;입니다. 기도하는 성도를 건드리는 것은 곧 하늘 보좌를 건드리는 것과 같습니다. <br/>성도의 작은 신음과 기도는 하나님의 개입을 불러일으키며, 일순간에 사탄의 왕국을 뒤흔드는 우레와 번개, 그리고 지진이 됩니다(계 8:5). <br/>기도하는 한 사람을 건드릴 때 무너지는 것은 성도가 아니라 사탄의 진영뿐입니다. <br/>셋째는 &#039;성령의 내주하심&#039;입니다. 이는 이 모든 방어막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인 힘입니다. <br/>사탄이 보기에는 눈에 잘 띄지도 않는 가시처럼 보잘것없어 보이는 성도일지 모르나,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은 우리를 말씀과 기도로 무장한 ‘영적 전사’로 빚어내십니다. <br/>결국 사탄의 공격은 우리를 더욱 단단하게 연단시킬 뿐이며, 전쟁의 끝은 언제나 하나님의 승리로 귀결됩니다.<br/><br/>&nbsp; 백년초 열매가 미세한 가시로 자신을 지켜내듯, 성도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말씀 순종’과 ‘기도’라는 최고의 방어막을 소유한 존재입니다. <br/>오늘도 우리를 지키시는 하나님의 세밀한 손길을 신뢰하며, 세상의 위협 앞에서도 당당히 승리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17 Apr 2026 17:34:3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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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랑의 낭비</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값비싼 향유 옥합을 기꺼이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여인의 이야기는 사복음서 전체에 등장하는 몇 안 되는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br/>노동자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니 그 가격이 삼백 데나리온이면 거의 노동자 한 명의 1년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니 결코 적지 않습니다. <br/>이를 목격한 제자들은 분개하며 명백한 ‘허비’라고 질타를 가합니다(마 26:8). <br/>‘허비’라고 번역된 ‘아폴레이아’는 대부분 ‘심판으로 인한 파괴와 멸망’(마 7:13; 벧후 2:1; 계 17:8)으로 번역되는 다소 과격한 용어입니다. <br/>이 단어를 사용한 것을 보면 제자들의 눈에는 일순간에 거액의 돈이 철저히 파멸되는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br/><br/>&nbsp; &nbsp;  그러나 예수님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십니다.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가 행한 일도 말하여 그를 기억하리라”고 하십니다. <br/>성찬식이 주님을 기억케 한다면 이 명령은 이 여인의 섬김을 기억케 합니다. 이보다 더한 칭찬은 성경 전체를 통틀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br/>하나님과 대면하여 대화하였다는 모세도, 하나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은 다윗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습니다. <br/>도대체 무엇이 이 여인을 이렇게까지 칭찬하시는 이유일까요? 답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br/><br/>&nbsp; &nbsp;  예수님께서는 “이 여자가 내 몸에 이 향유를 부은 것은 내 장례를 위하여 함이니라”(마 26:12)고 하십니다. <br/>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기까지 무리를 향하여, 제자들을 향하여 거듭, 거듭 말씀하신 것은 고난 당하심과 죽임 당하심 그리고 삼 일만에 살아나실 것이었습니다. <br/>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일까요? 불변의 복음이 이에 대한 답을 줍니다: <br/>“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br/>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17)<br/><br/>&nbsp; &nbsp;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종의 형체를 가져, 자신을 다 깨뜨리는 심판을 통해 멸망으로 나아가시려는 것입니다. <br/>예수님께서 자신을 파괴하시는 이 죽음은 향유 옥합을 깨뜨리는 것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역대급 낭비인 것입니다. <br/>여기 향유를 깨뜨려 ‘허비’한 행동은, 인류의 ‘멸망(아폴레이아)’을 짊어지기 위해 스스로를 깨뜨리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예고합니다. <br/>제자들은 물질의 경제적 가치가 사라지는 것을 ‘멸망’이라 보았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이란 멸망을 통해 인류를 ‘심판의 멸망’에서 구원하는 ‘거룩한 경제학’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br/>그러니 감히 누가 예수님의 이 죽음 앞에서 자신의 것을 다 깨뜨려 드리는 것을 낭비라고 질책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파멸이 아닌 ‘사랑의 낭비’인 것입니다. <br/><br/>&nbsp; &nbsp;  이 여인의 헌신이 ‘사랑의 낭비’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대상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가장 위대한 사랑의 낭비’를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br/>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피조물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만큼 비경제적인 사건은 없습니다. <br/>제자들은 계산기를 두드렸으나 여인은 자신의 심판을 대신하여 멸망을 짊어지시는 주를 향하여 심장을 드렸습니다. <br/>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행하신 최고의 낭비인 십자가 덕분에 우리가 값을 계산할 수 없는 영생이라는 선물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br/>이렇게 주님의 우리를 위한 성찬의 깨어짐과 우리의 주님을 위한 옥합의 깨어짐이 만나는 곳에 사랑이 완성됩니다. <br/>그러므로 신앙이란 효율성을 따지는 ‘계산’이 아니라, 나를 위해 전부를 허비하신 그리스도께 나의 전부를 쏟아붓는 ‘사랑의 낭비’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Sat, 11 Apr 2026 14:20:5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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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참 ‘캐셔로’ – 비움으로 채워지는 부활의 신비</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요근래에 방영된 ‘캐셔로’라는 독특한 제목의 드라마가 있습니다. <br/>‘현금’을 뜻하는 ‘캐쉬(Cash)’와 ‘영웅’이란 단어 ‘히어로(Hero)’가 합쳐진 이 드라마의 주인공은 몸에 현금을 지니고 있어야만 초능력이 발휘되는 ‘현금 영웅’입니다. <br/>그래서 ‘캐셔로’입니다. 재미있는 점은 능력을 쓸 때마다 지니고 있던 돈이 소모되고, 액수가 많을수록 능력도 강해진다는 설정입니다. <br/>만약 돈이 아까워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외면하면 몸에 고통스러운 피부병이 생기고, 반대로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 도와주고 나면 씻은 듯이 낫는 숙명을 지녔습니다.<br/>&nbsp; 극 초반, 주인공은 자신의 재산이 줄어드는 것이 두려워 무거운 짐을 든 노인이나 폭력을 당하는 이웃을 못 본체 지나칩니다. <br/>이런 자신에게 스스로 위로하는 말이 있습니다. “다른 히어로들도 만약 자신의 재산이 사라진다고 하면 쉽게 나서지 못할 거야”라는 독백입니다. <br/>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의 것을 지키기 위해 능력을 아낄수록 주변 사람들은 떠나가고 삶은 피폐해집니다. <br/>반면, 자신의 것을 다 내어 능력을 발휘할 때 비로소 사람들이 모여들고, 서로를 위해 희생하는 아름다운 사랑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br/><br/>&nbsp; &nbsp;  이 드라마의 내용이 문득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특히 부활의 증인으로 사는 삶을 돌아보게 합니다. <br/>우리 역시 세상을 섬기고 변화시키라는 소명과 함께, 세상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도 없는 성령의 임재라는 ‘초-초능력’을 값없이 부여받은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br/>하지만 우리의 이 놀라운 능력은 종종 극도로 제한되곤 합니다. ‘내 시간, 내 물질, 내 생명’을 잃지 않으려 그 능력을 스스로 가두어 버리기 때문입니다.<br/>내가 소모되는 것이 두려워 영적 능력을 사장시킬 때 우리 영혼과 사회에는 육체적, 사회적인 질병이 만연하고, 공동체의 연합은 깨지며, <br/>악과 불의, 불평등이 팽배한 세상이 더욱 확대되는 현상이 지속될 것입니다(롬 1:18-32). <br/><br/>&nbsp; &nbsp;  이번 부활절 ‘참 캐셔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묵상합니다. <br/>주님은 하늘의 영광이라는 ‘비용’을 다 지불하시고 이 땅에 오셨으며,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살과 피, 생명이라는 전 재산을 우리를 위해 완전히 소모하셨습니다. <br/>세상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완벽한 ‘소비’이자 ‘상실’이었으며, ‘히어로’가 아닌 ‘루저’였습니다. <br/>그러나 하나님은 그 비움을 통해 ‘부활’이라는 인류 최대의 초능력을 일으키셨습니다. <br/>주님이 자신을 다 내어주셨을 때 죽음의 권세는 깨어졌고, 우리는 영원한 생명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br/><br/>&nbsp; &nbsp;  부활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주님을 본받아 ‘나를 소모하며’ 살아갈 때 재현되는 현재 진행형의 역사입니다. <br/>우리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용납할 때”(엡 4:2), 그리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될 때”(딤전 6:18), <br/>우리 안에 잠들어 있던 부활의 능력이 깨어납니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br/>우리에게 주신 건강, 재능, 물질, 생명까지도 나를 위해 쌓아두라고 주신 예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꺼이 소모하라고 맡겨주신 ‘부활의 도구’라는 점입니다.<br/><br/>&nbsp; &nbsp;  성 프란치스코의 기도처럼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는’ 신비야말로 부활의 참된 의미입니다. <br/>이번 부활절, 내 것을 아끼는 ‘방어적 삶’에서 벗어나, 주님처럼 나를 기꺼이 소모하여 이웃을 살리는 ‘참 캐셔로’의 삶을 시작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br/>다른 이의 아픔을 채우려 비워낸 자리마다 무덤을 이기고 피어난 부활의 생명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Sat, 11 Apr 2026 13:51:50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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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사순절 - 우리를 깨우치는 하나님의 모략</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절의 기간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을 다시 새롭게 빚어가는 소중한 은총의 시간입니다. 이 기간은 느슨해졌던 마음을 추스르고, 잊고 살았던 은혜를 기억하며, 무뎌진 사랑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039;회복의 기회&#039;이기 때문입니다. 성과와 결과만을 재촉하는 세상의 속도에서 잠시 벗어나, 하루하루 과정을 소중히 여기며 세상 속에서 희석되었던 일상의 영성을 되찾아 가는 40일의 과정 그 끝에서 우리는 부활의 주님과 하나가 되고, 우리 곁에 와 계신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회복하게 됩니다. <br/>&nbsp; 그런데 이 ‘회복’은 왜 우리에게 그토록 절실할까요? 군대의 지침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을 수 없다.” 나폴레옹의 말이냐, 맥아더의 말이냐라는 출처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담긴 준엄한 교훈입니다. 전쟁터에서 작전은 예상치 못한 변수나 천재지변으로 인해 최선을 다했음에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039;경계&#039;는 다릅니다. 늘 깨어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적의 침입을 살피는 것은 지휘관이 지켜야 할 가장 기본적인 책무이기 때문입니다. 작은 방심과 안일함, 습관적인 태만이 부대 전체를 위태롭게 하듯, 영적인 경계의 실패 또한 우리 영혼을 통째로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br/>&nbsp; ‘작전 실패’와 ‘경계 실패’를 신앙에 비유하면 ‘작전 실패’에 해당하는 것으로는 기도로 준비하며 어떤 사역을 계획했지만 열매가 적거나, 기대만큼 되지 않은 것 그리고 열심히 했는데도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고, 결과가 보잘것없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비록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최선을 다 했음으로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내와 겸손,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법을 배우는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반면 ‘경계 실패’는 훨씬 엄중한 문제입니다. 음란과 탐욕, 명예욕과 같은 죄의 유혹이 문턱까지 와 있음을 알면서도 ‘이 정도는 괜찮겠지’ 하며 방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의 경고와 양심의 울림을 반복해서 무시할 때 영적 긴장은 서서히 풀리고, 결국 나 자신뿐 아니라 가족과 교회 공동체, 나아가 믿지 않는 이들에게까지 깊은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래서 훨씬 더 무겁고 엄중한 문제입니다.<br/>&nbsp; 우리는 세상의 거친 위력 앞에 늘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때로는 작전에 실패하고, 때로는 경계에 무너지며 좌절합니다. 그런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려고 주님은 우리에게 오셨고, 기꺼이 십자가로 가시며, 거듭 또 다른 보혜사로 신속히 오시겠다는 약속을 주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게 되고, 주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기에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면 얻으리라 하십니다(요 15:7). 이는 곧 어떤 작전을 세우든 주의 뜻을 이루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열매를 풍성히 맺어 그 결과가 아버지의 영광이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실족하지 않게 매일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가르치시며 경계를 성공적으로 이끄시어 세상 끝날까지 깨어 있는 주의 제자로 이끄실 것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요 16:1, 8). 이러한 삶의 회복을 위해 보혜사 성령으로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해마다 돌아오는 사순절은 우리를 사랑의 열매로 이끄시는 &#039;작전의 승리&#039;이자, 매일의 삶을 지키시는 &#039;경계의 성공&#039;을 위한 하나님의 자비로운 모략입니다. 이 거룩한 여정을 통해 우리 모두가 성령과 함께하는 진정한 회복의 기쁨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4:3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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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영실을 지나 사려니 숲을 거쳐 한라까지</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제주 살이를 하며 길을 나서면, 예사롭지 않은 이름이 적힌 이정표들을 마주하곤 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섬 특유의 낯선 지명이겠거니 하며 가벼이 넘겼지만, 같은 길을 반복해 오가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추적하다 보니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이 이름들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하늘을 향한 제주 사람들의 간절한 신심(信心)이 오롯이 새겨진 신앙의 고백이라는 사실입니다. 그중에서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영실(靈室)’ 계곡과 ‘사려니 숲’은 제 마음을 깊은 묵상으로 이끌었습니다.<br/>&nbsp; 먼저 ‘한라산(漢拏山)’의 의미를 새롭게 마음에 담아봅니다. 제주의 중심에 우뚝 서서 어디서나 바라보이는 이 산의 이름에서 ‘한(漢)’은 은하수를, ‘라(拏)’는 붙잡는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손을 뻗으면 능히 은하수를 붙잡을 수 있을 만큼 높은 산이라는 뜻이지요.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한 지리적 높이를 넘어, 하늘과 땅이 만나는 신성한 통로라는 영적인 갈망이 서려 있습니다.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1-2)”신 말씀처럼,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또한 날마다 영적인 한라산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임을 느낍니다. 이 사순절의 시기에 ‘영실’과 ‘사려니’를 지나 ‘한라’로 향하는 길은, 우리 신앙의 현주소를 다시금 돌아보게 합니다.<br/>&nbsp; ‘영실’은 한라산 남서쪽으로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골짜기를 부르는 명칭입니다. 그 골짜기는 형형색색의 수많은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탓에 ‘영적인 기운이 느껴지는 거처’라 하여 ‘영실(靈室)’이라고 이름하였습니다. 산의 정상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이 깊은 골짜기를 거쳐야 한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깊은 영적 교훈을 줍니다. 비록 낮고 험한 골짜기일지라도, 그곳이 곧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지성소가 된다는 확신입니다. 때로는 우리가 겪는 낮아짐의 고난이 오히려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고난의 깊이가 곧 믿음의 높이가 되는 역설의 장소, 그곳이 바로 ‘영실’입니다. 우리의 시련과 환난은 머물러야 할 종착역이 아니라, 우리를 ‘성령의 거처(靈室)’인 견고한 반석으로 빚어내어 그 산으로 이끄시는 거룩한 과정인 것입니다. <br/>&nbsp; 그 골짜기를 지나 이제 ‘사려니 숲’길을 걷습니다. ‘사려니’는 제주 방언으로 ‘살안이’ 혹은 ‘살안길’이라 하여, ‘사람이 살며 조심히 다녀야 하는 거룩한 기운이 감도는 곳’을 의미합니다. 그저 아름다운 숲이 아니라 신의 숨결이 깃든 곳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경외의 장소인 셈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출 3:5)” 하신 말씀이 이 길 위에서 새롭게 다가옵니다. 우리의 일상이 하나님 앞(Coram Deo)에서 얼마나 조심스럽고도 경건한 경외함으로 채워져야 하는지를 이 숲길은 묻고 있습니다.<br/>&nbsp; 제주 곳곳에 이토록 신령한 지명이 많다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 신을 향한 본능적인 염원이 있음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사순절은, 그 모든 염원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인하는 은혜의 시간입니다. 우리는 이제 물리적인 한라산에 오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주러 오신 주님이 바로 우리의 ‘한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위해 낮고 천한 곳까지 내려오신 주님을 영접한 삶이 곧 ‘영실’이요, 그 주님과 동행하며 걷는 모든 일상이 곧 ‘사려니 숲’이 됩니다. 이번 사순절, 주님을 따르기로 새롭게 결단하는 우리를 통해 제주의 모든 지명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완성되기를, 그리하여 이 땅 가득 주님의 영광이 머물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3:4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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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반석' 위에 '외돌개'로</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제주도 서귀포 앞바다를 두르는 7번 올레길 선상의 바다에는 ‘외돌개’라 이름 붙여진 유명한 바위기둥이 있습니다. 높이는 20여 미터에 이르고, 폭은 7-10미터 정도로 화산이 폭발하여 분출된 용암이 긴 시간 파도의 침식으로 바다 위에 우뚝 솟아 현재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2011년 6월 30일에는 우리나라 명승 제79호로 지정되기도 했습니다. ‘외돌개’라는 이름은 덩그러니 육지와 거리를 두고 밖에 떨어져 있기에 바깥을 의미하는 한자의 ‘외’(外) 자와 바위를 의미하는 우리 말 ‘돌’ 그리고 바다로 튀어나온 절벽이나, 곶을 뜻하는 제주 방언 ‘개’가 합하여져서 이루어진 이름으로 ‘바다 가운데 홀로 떨어져 서 있는 바위’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올레길이 있는 해안 절벽에서 조금 떨어진 바다에 혼자 우뚝 서 있는 큰 바위기둥이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여졌을 것입니다. 마침 머무는 숙소의 앞쪽에 이 올레길이 있어 아침 산책을 할 때마다 인상 깊게 보게 되었습니다.<br/>&nbsp; 볼 때마다 어떻게 저 바위기둥이 그렇게 기나긴 세월 동안 파도와 폭풍우를 견디며 저렇게 꿋꿋하게 서 있을 수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바다 가운데 홀로 떨어져 서 있는 바위’라면 결코 지금처럼 저렇게 서 있을 수 없을 것이며 벌써 쓰러졌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깊이 살펴보면 사실 그 돌기둥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돌기둥 아래에는 단단한 기반 암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파도가 밀려와도 그 바위는 무너지지도, 쓰러지지도 않는 것입니다. 든든한 반석에 연결되어 서 있기 때문입니다. <br/>&nbsp;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듭니다. 흡사 세상 속에서 혼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홀로 선 존재 시몬이라는 이름으로는 결코 그러한 세상을 이겨낼 수가 없습니다. 시몬이라는 보잘 것 없는 인생은 세상의 파도가 한 번만 거세게 휘몰아쳐와도 흔들리는 인생일 뿐입니다. 그러나 연약한 인생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설 때 그는 반석이라는 뜻의 베드로가 됩니다. 시몬이 단단한 외돌개 같은 바위기둥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결코 스스로 서 있는 존재가 아닌 진정한 반석이시며, 머릿돌 되신 예수님께 연결되었기에 세상을 능히 이기는 존재가 되며, 마침내는 음부, 즉 하데스라는 지옥의 권세가 결코 이기지 못하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br/>&nbsp;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 가운데 서 있는 존재들입니다. 파도가 밀려오고, 폭풍우가 휘몰아칩니다. 이 상황이 호전되고, 좋아져서 더 이상 파도도, 폭풍우도 없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바위기둥이라는 베드로로 세우시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바다에 파도가 없다면 바다가 아니듯이 이 세상에 풍파가 없다면 이미 세상이 아닐 것입니다. ‘음부의 권세’는 계속해서 우리의 삶을 강타할 것입니다. 그 ‘권세’라는 말이 ‘대문’이라는 단어라는 점에서 사탄은 계속해서 우리를 지옥의 문으로 끌어넣으려고 땀이 피가 되도록 애쓸 것입니다. 아무리 거센 파도와 폭풍우가 휘몰아쳐도 외돌개가 쓰러지지 않는 것이 기반 암석에 든든하게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듯이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탄이 아무리 흔들어도 무너지지 않도록 피와 물을 다 쏟아주시어 마침내 예수님 안에 고정시켜 주셨습니다. 이제는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 그 날에 그 생각조차 소멸되는 인생을 의지함이 아닌(시 146:4), 진정한 반석이시며, 우리의 머릿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외돌개로 다시 서야 합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3:06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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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소철 열매 같던 우리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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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하나님의 은혜와 온 교회 성도님들의 배려로 주어진 4개월의 안식년, 그 반환점을 돌 때쯤 드디어 제주살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숙소 거실의 통유리창 너머로 당당하게 서 있는 소철 나무들이 보이고, 그 곁으로는 한라봉이 주렁주렁 매달린 밭이 펼쳐져 있습니다. 조금만 걸어가면 바다를 품은 올레길이 나타나니, 이토록 소중한 시간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는 풍경입니다.<br/>&nbsp; 며칠간 머물며 유독 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당 한편의 소철 나무 아래 떨어진, 500원 동전 크기만한 타원형 열매들이었습니다. 평소 식물에 관심이 많던 터라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얇은 막을 벗겨낸 열매는 피칸이나 호두처럼 아주 단단했습니다. 속이 궁금해 발로 깨뜨려 보니 의외로 하얀 분말이 가득했습니다. 호기심에 맛을 보려 하자, 과거 독성 있는 나물을 먹고 고생했던 저를 기억하는 아내가 강력히 만류했습니다.<br/>&nbsp; 궁금증을 이기지 못해 소철 열매가 어떤 성분을 가지고 있나를 쳇GPT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답변은 “소철의 열매에는 독성이 있습니다. 특히 ‘사이카신(cycasin)’이라는 독성 물질이 들어있어 날것으로 먹으면 구토, 간 손상, 신경계 이상 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라는 응답이 왔습니다. 아내는 승기를 잡은 듯 의기양양했지만, 제 마음을 흔든 문장은 그 다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철 열매는 유용하게 사용되어 왔습니다.”라는 언급이었습니다.<br/>&nbsp; 일본 오키나와 등지에서는 기근이 닥쳤을 때 이 열매를 식량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독을 빼기 위해 물에 여러 번 씻고 오래 담가 발효시키는 정성스러운 과정을 거치면, 사람을 죽이는 독이 사람을 살리는 귀한 전분이 되었던 것입니다. 또한 동아시아 일부 지역에서는 이를 말려 통증을 완화하고 혈액순환을 돕는 약재로도 사용했다고 합니다.<br/>&nbsp; 그 순간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에 결코 버려질 영혼이나 포기해야 할 사람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치명적인 독을 품은 열매라도 정화와 정성의 시간을 거치면 생명의 양식이 되듯, 그 어떤 완악한 죄인이라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존재가 된다는 진리를 다시 새기게 됩니다. <br/>&nbsp; 본래 우리는 독성으로 가득한 소철 열매와 같은 존재들이었습니다. 그런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의 보혈로 정결케 하시어 마침내 ‘성령의 열매’로 빚어내시는 주님의 손길이 참으로 경이롭습니다. 이를 위해 기꺼이 피와 물을 다 쏟아부어 주시는 이 사순절의 사랑이 더욱 감사함으로 다가옵니다. 남은 안식년의 시간, 생수의 강에 젖어 제 안의 독기는 빠지고 오직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만이 가득 차기를 소망해 봅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1:48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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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 6:63)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심각할 정도의 오해를 갖게 만듭니다. 흡사 육체는 의미 없고, 영혼만 중요하다고 여기게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헬라 철학의 주장처럼 이 세상의 때가 묻은 더러운 육체는 썩어 없어질 것이나, 영혼은 불멸한다는 사상을 옹호하는 것처럼 느껴져 혼돈을 자아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어디에도 사람의 육체는 무의미하며, 영만이 거룩하다라고 말하는 곳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예수님의 정체성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는 말씀은 그 자체로 모순이 될 것입니다. 무익한 육신을 입고 오셨는데 영광이라는 단어는 물론, 은혜와 진리 또한 결코 함께 갈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br/>&nbsp; 그렇다면 요한복음에서 이 영과 육의 이분법은 무슨 의미를 전하려는 것일까요? 그 대답은 문맥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문맥을 벗어난 말씀 해석은 하나님의 의도를 해체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 영과 육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오병이어’라는 또 하나의 표적 이야기 속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육의 양식을 공급해 주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 왕으로 삼으려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뒤로하고 단호히 떠나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표적의 진정한 의미를 설명하십니다. <br/>&nbsp; 오병이어 사건이라는 표적은 마침내 “예수님이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시며, 그 떡을 먹는 다는 것은 곧 그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인 줄 믿고 아는 것”으로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리는 것은 영이요, 육은 무익하다는 것은 육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적 생각, 믿음 없는 차원, 성령 없이 이해하려는 태도로 육체적인 껍질에 얽매인 사고를 뜻하는 것입니다. <br/>&nbsp; 이 영과 육의 구별은 생명을 주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인간적인 계산과 물리적인 이해로는 그 생명을 알 수 없고, 누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요한복음 3:6절에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라”는 말씀을 통해 거듭남의 의미를 분명히 알려 주셨습니다. 바로 성령으로 난 사람이 거듭난 사람이며, 그 성령의 조명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할 때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것이 영생의 길”이라는 의미는 바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는 것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br/>&nbsp;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려는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서는 떠나시지만, 영생의 말씀이 예수님께 있으니 예수님을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믿고 아는 사람들과는 함께하십니다. 이 믿음이 영에 속한 사람임과 이미 영생 안에 사는 사람임을 확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바로 제자인 것입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20:3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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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스마트 주행기술</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이곳저곳으로 이동을 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노라면 간간이 눈에 띄는 경고문이 있습니다. “스마트 주행기술 너무 맹신하지 마세요”라는 내용입니다. 이는 아직 차량이 독자적으로 자율주행을 할 수 있는 전반적인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지 않기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자율주행은 보통 0–5단계로 나뉘는데 지금 현재는 2-2.5단계의 크루즈 기능으로 일정한 속도로 자율주행이 가능하지만 핸들에서 손을 떼지는 말아야 하는 운전자 보조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보다 위인 3단계는 조건부 자율주행으로 특정 조건에서 운전자가 손을 떼도 되지만 비상시는 개입이 필요한 단계로 현재 상용화가 진행 중입니다. 그리고 4단계는 고도 자율주행으로 정해진 구역 내에서 운전자의 개입이 전혀 필요 없는 단계로 일부 지역에서 무인 택시나, 무인 버스가 운행 중입니다. 그렇다면 최상위인 5단계는 어느 지역에서든지 운전자의 개입이 필요 없는 고도 자율주행이 가능한 단계로 실현되기까지는 연구와 시간이 좀 더 필요합니다.<br/>&nbsp; 이처럼 아직은 주변을 달리는 모든 차량이 자율주행이 가능한 것이 아니며 또 각 차량마다 그 성능에 있어서도 차이점이 있기에 자기 차량의 스마트 주행기술에만 의지했다가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 곳곳에서 사고가 발생하기에 스마트 주행기술 너무 맹신하지 말라는 경고문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심각하게 경고하는 이유는 사람의 생명이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안전과 생명을 위해 기계에 핸들을 전적으로 맡기지 말라는 경고이면서, 사람의 주권을 넘기지 말라는 소리로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안전과 생명까지도 전적으로 맡길 수 있는 5단계의 고도 자율주행이 실현되는 날이 올 것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물론 이 또한 인간의 일이기에 사고위험이 100% 해소된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br/>&nbsp; 그런데 여기 100% 안전이 보장되는 스마트 주행기술이 있습니다. 주변을 달리는 사람들에게 설사 그 기술이 장착되지 않았을지라도 안전이 전적으로 보장되는 스마트 기술입니다. 자동차로 이동할 때 목적지를 정하고 달려가듯이 우리 또한 삶의 목표를 세우고 나아갑니다. 그 목표로 나아갈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완벽한 스마트 주행기술에 전적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그 기술의 특허권자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만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입니다(롬 8:28). 그래서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네가 경영하는 것이 이루어지리라”(잠 16:3)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br/>&nbsp; 이제 필요한 것은 모세와 여호수아가 들었던 말씀에 우리 또한 응답하는 것입니다: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 수 5:15). 약속의 땅 가나안이 거룩한 땅이 되는 것같이 이 세상이 거룩한 땅이 되는 길은 오직 시작에서도, 결론에서도 발에서 우리의 신을 벗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주권을 벗고, 우리 인생의 핸들을 주께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의 전적인 인도를 받는 삶입니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전 5:1). 신을 벗고, 발을 삼가는 것은 말씀을 듣는 것으로, 이는 곧 순종이 스마트 주행기술의 최고봉인 고도의 자율주행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때로 순종이 우리 눈에 사고 발생 요인으로 보일지라도 결국은 모두의 안전이 보장되는 최고의 길입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19:43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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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내려오시는 하나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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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구약과 신약을 통하여서 가장 악명 높은 도시의 대명사를 들라고 한다면 단연 소돔과 고모라일 것입니다(창 18:20; 신 29:23; 사 13:19; 렘 49:18; 암 4:11; 마 10:15; 벧후 2:6; 유 1:7). 그 도시들의 죄악은 이미 하나님께서 다 보시고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소돔과 고모라의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내가 이제 내려가서 그 모든 행한 것이 과연 내게 들린 부르짖음과 같은지 그렇지 않은지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창 18:20-21)고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십니다. <br/>&nbsp; 이미 다 알고 계신데 그럼에도 직접 내려오셔서 그 진의를 정확하게 더 살펴보려 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 들으셨고, 아셨다는 것은 더 이상 확인해볼 필요조차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증거보다 더 확실한 확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내가 이제 내려가서, 내가 보고 알려 하노라”는 말씀 속에는 심판이 목적이 아니라, 살리는 것이 목적이심이 분명합니다. 혹여 마지막 순간에라도 마음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일말의 양심이라는 것이 마음 중심에 파편으로라도 남아 있어 그것이 돌이킴의 씨라도 되지 않을까라는 기대하심으로 “내가 다시 한 번 더 살펴보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엿보입니다. 그런데 그 애절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내어놓고 있다는 것이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이야기의 중요한 본질입니다. <br/>&nbsp; 천사들은 소돔으로 향하게 하시고, 정작 “내가 내려가서 직접 보려하노라”고 하신 하나님께서는 왜 아브라함 앞에 그대로 서 계실까요? 아브라함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 간절한 바램으로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중재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선택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은 자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야 할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br/>&nbsp;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면 얼마든지 도전하라고 아브라함 앞에 서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일을 위해서는 밤새워, 새벽을 깨우며 하나님께 도전하지만, 남의 일에는 적당히 일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자신의 생명을 걸고 소돔과 고모라를 위하여 간구합니다. 티끌과 재 같은 인생이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여섯 번이나 조건을 바꾸어 가며 간구합니다(창 18:27). 그런데 하나님이 기꺼이 들으십니다. 천하보다 귀한 자녀들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기에 심판을 늦추시기를 간절히 소망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은 하루가 천년 같이, 천년이 하루 같이 한 사람도 멸망에 이르지 않도록 기다리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간절한 기다림의 시간을 주께서 오시지 않는다는 것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br/>&nbsp; 하나님께서 천사들과 함께 “우리가 거리에서 밤을 새우리라”(창 19:2)는 말씀은 곧 심판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말의 동정심을 기대하시며, 그 밤에 한 사람이라도 찾으시려는 간절한 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한 사람으로 인해 멸망이 아닌, 회복의 가능성을 보시고 또 천년을 기다리시려는 마음일 것입니다. 매일을 마라나타로 기다리되 그 일상의 하루가 천년을 기다리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길은 주님의 마음을 우리가 품는 것입니다(빌 2:5). 바로 친히 내려오셔서 밤새워 살피시는 그 마음속에 세상이 사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19:1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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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지혜를 배우는 길</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 9:10)는 말씀을 되뇌이며 수시로 이런 질문을 하게됩니다. “나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말씀따라 살려고 애쓰는데 왜 나에게는 삶의 지혜가 이렇게도 부족한가?” 이 질문은 살아가며 거듭 실수하는 자신을 돌아보고, 자책하며 하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때로는 주변 사람들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는 실수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시간을 돌리고 싶을 만큼 뼈아픈 큰 후회를 남기는 실수를 하기도 합니다. 분명 하나님의 지혜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정말 전심을 다해 경외하며 살아가려 최선을 다 하는데 지혜가 부족함이 왜인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그리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를 깊이 숙고해봅니다.<br/>&nbsp; 만약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라는 것이 저절로 지혜를 알게 된다는 말로 들린다면 실족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기초가 될 때 참 지혜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저절로 지혜가 쌓인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배우는 것은 한순간이 아니라, 참 긴 시간이 소요될 수 있으며, 성공적인 길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실패를 통해서 배울 때가 많고, 또 실패는 아닐지라도 고통스런 삶의 정황을 통해서 삶이 될 때가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br/>&nbsp; 잠언서로 지혜를 전해주는 팀 켈러 목사의 『오늘을 사는 잠언』이라는 매일 묵상집에는 지혜를 배우는 길에 대한 의미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사실 지혜는 가까운 친구의 뼈아픈 지적, 실수에서 배우는 교훈, 하나님의 섭리로 우리 삶에 허락된 고난을 통해 얻을 때가 많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로 유명한 소설가 겸 수필가인 마르셀 프루스트의 “아무도 대신해 주거나 면제해 줄 수 없는 광야를 통과한 후에만 지혜를 발견할 수 있다”는 말도 동일한 의미를 전달해 줍니다. 이 두 사람의 말을 통해 지혜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br/>&nbsp; 그런데 그 경험이라는 것이 어느 하나 결코 쉬운 것이 없습니다. 가벼운 지적도 아니고, 뼈아픈 지적은 때로 참 견디기 힘들 수 있습니다. 때로 그것을 극복하기까지 꽤 긴 시간이 소요될 수 있습니다. 실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실수의 강도가 크면 클수록 후회의 강도도 클 것이며, “이렇게 했어야 하나, 저렇게 했어야 하나”를 반복하며 다시 돌이킬 수 없는 복기를 계속하게 됩니다. 이렇게 돌아보는 횟수와 후회가 많으면 많을수록 뼛속 깊숙이 교훈이 새겨지게 됩니다. 또 질병, 실연, 고독, 좌절, 실패와 같은 광야의 고난은 하나님의 섭리임에도 정말 겪고 싶지 않은 상황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No pain, no gain(고통 없이는 얻는 것도 없다)”이란 말처럼 지혜도 동일합니다.<br/>&nbsp;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묵묵히 견디며,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삶의 다양한 경험들, 때로는 실패까지도 마침내 미련한 결론이 되지 않고, 결국은 지혜로 자리 잡기 위해서 그 상황을 가장 바르게 이기고, 견디게 하는 근본이 바로 여호와 경외인 것입니다. 이 경외가 모든 상황을 다 아시고, 주권자시며, 해결자이신 하나님만을 믿고 신뢰하는 길로 이끌어 그 시간을 가장 바르게 견딜 수 있는 마음 자세를 가능케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가장 힘든 때가 최고의 지혜를 배울 때이며, 여호와 경외의 최고봉에 도달할 때이니 온전히 기뻐하십시오(약 1:2).]]></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ue, 31 Mar 2026 17:18:37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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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새벽 미명을 통과하며</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새벽 미명(未明)’은 아침의 여명이 밝아오기 전의 가장 어두운 시간입니다. 칠흑 같은 어둠으로 너무나 어두워서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의 극심한 어둠의 시간을 의미합니다. 신앙인의 삶에도 그런 순간은 찾아옵니다. 이미 겪어 보신 분도 있고, 현재 겪고 있는 분도 있으며, 미래에 겪게 될 분도 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시간을 신속히 빠져나가야 할 고통으로만 여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새벽 미명의 칠흑 같은 어둠까지도 빛을 향해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됩니다.<br/>&nbsp; 요셉의 이야기는 익히 잘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17살에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삶에서 갑작스레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는 비운을 맞이하게 됩니다. 거기에 덧붙여 안정된 종살이를 하나 싶다가 갑작스레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게 됩니다. 만약 풀려난다 해도 범죄자라는 오명이 늘 붙어 다닐 것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성범죄에 해당하는 것이니 더욱 파렴치한으로 몰릴 것입니다. 그렇게 13년의 세월 동안 종살이, 감옥살이로 인생이 철저히 무너지고, 망가진 삶을 살아갑니다. 남의 이야기이다 보니 13년도 짧아 보이지만, 실제로 그런 칠흑 같은 어둠의 시간을 거쳐 가는 사람들에게는 그 기간은 고통스럽게 점점 더 깊은 지옥으로 빨려들어 가는 시간일 것입니다.<br/>&nbsp; 요셉의 삶에 종살이할 때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주인에게도 인정받으며 형통하였다고 하고(창 39:2), 감옥살이할 때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간수장에게 인정받으며 형통하였다고 합니다(창 39:23). 그럼에도 그 세월은 결코 행복하다고만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그 시간의 막바지에 술 맡은 관원장을 향한 요셉의 호소를 들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잘 되시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아뢰어 이 집에서 나를 건져 주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하지 아니하였나이다”(창 40:14-15). 기나긴 세월의 고통스런 상황을 견디다 견디다 한계치에 다다른 인생의 억울함이 가득히 묻어나 있는 호소가 요셉의 입에서 쏟아져 나옵니다. 이 간절한 호소를 술 맡은 관원장이 새까맣게 잊어버립니다. 그리고 2년 뒤 바로가 꿈을 이야기할 때에야 비로소 요셉을 기억합니다. 13년 세월의 마지막 정점이 되는 시간인 그 2년은 요셉에게 그 어디에서도 빛을 볼 수 없는 새벽 미명의 칠흑 같은 어둠의 시간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분명 함께하시나 현실은 더 이상 짙어질 수 없는 어둠만이 보일 뿐이었습니다. <br/>&nbsp; 하나님께서 왜 이런 새벽 미명의 시간을 허락하실까요? 요셉에 관해 말하는 시편이 그 이유를 분명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시 105:18-19). 이렇게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온몸이 묶인 삶, 그 어둠의 시간은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의 단련이었다고 합니다. 단련은 금과 은을 제련하여 순금으로 만드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그 어떤 말도 듣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이는 사람을 세워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세상의 말로 가득한 어둠 속에서 오직 하나님께만 신뢰를 두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2년이 여호와의 단련을 통해 미명 속에서도 말씀의 빛을 보는 시간이며, 마침내 요셉의 입에서 억울함의 호소인 ‘너 때문에, 당신 때문에’가 아닌 ‘하나님께서’라는 고백만이 흘러나오는 시간이 됩니다. 삶의 새벽 미명은 이 길로 이끌기 위함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hu, 05 Feb 2026 18:21:04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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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문을 두드리는 두 존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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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cription><![CDATA[어느 시기부터 누군가가 문을 두드리거나,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낯선 시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인의 집을 방문하는 것도 그리 녹록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한 자녀의 집도 거듭 확인을 한 후에나 가능합니다. 이런 시대와 문화에 처해 있는 현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늘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두 존재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라는 범주에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다 포함됩니다. 도대체 어떤 존재들이 이 세상 모든 인류의 문을 약속도 없이 무시로 두드릴 수 있을까요? 먼저 늘 우선권을 취하시는 존재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가인의 이야기를 묵상하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간절하게 가인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지를 보게 됩니다. <br/>&nbsp; 첫 번째로 가인과 그 제물을 받지 않으시는 것으로 두드리십니다. 이에 대한 그의 반응은 몹시 분노하며 안색이 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두 번째로 하나님께서는 신속하게 그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간절히 호소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틈을 타 가인의 마음을 두드리는 또 다른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는 결코 인정이라고는 눈꼽만큼도 없으며, 삶을 철저히 망쳐버리는 존재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죽음으로 끝이 나야 두드림을 멈추는 존재입니다. 그것은 바로 ‘죄’로 표현된 또 다른 인격체로 하나님이 가인의 마음 문을 두드리시는 것처럼, 죄 또한 문에 엎드려서, 간절히 원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두 두드림에 대해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는 말씀을 통해 어느 쪽으로 문을 열어야 할 것인지를 분명하게 전합니다. 그러나 가인의 선택은 아벨을 들로 데리고 가 쳐서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문이 어느 쪽으로 열리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쪽으로 문이 열리고 있는 와중에도 하나님께서는 두드리심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세 번째로 가인에게 다가가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으로 마음을 두드리시며 돌이키려 하십니다. 이에 대하여 가인은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는 항변으로 매몰차게 거부합니다. 그럼에도 네 번째로 징벌의 심각성을 부각시키시며 땅이 더 이상 소출을 내지 않을 것이며, 평생을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는 선고를 내리십니다. 제발 이런 길로 가지 말고 돌이키기를 소망하시는 것입니다. 이를 듣고 가인이 돌이키기보다는 자신을 만나는 자가 자신을 죽일 것이라고 호소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섯 번째로 또 그의 심령을 두드리시며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을 것이라고 하시며 보호의 표를 주십니다. 이는 어느 쪽을 향해야 사는 길인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br/>&nbsp; 그러나 가인의 최종선택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연 회개와 영접이 아니라, 여호와 앞을 떠나 성을 쌓고 유리하는 삶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이 성은 하나님을 향한 차단막이면서 동시에 사탄이라는 죄를 향한 열린 문이 됩니다. 그럼에도 확신하는바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가인이 이<br/>&nbsp;땅의 생을 다 하는 날까지 결코 그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것을 멈추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가인이 죽음을 눈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 어떤 선택을 하였는지는 우리가 천국에 도착해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도 두 존재가 우리의 마음 문을 두드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더 깊은 교제를 원하시기에 두드리시고, 죄라는 사탄은 우리를 유기시키려고 두드립니다. 오늘 하나님을 향한 생명의 교제를 택하십시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Thu, 05 Feb 2026 18:20:11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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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제자도를 말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고난의 길을 처음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주신 내용입니다. <br/>바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는 말씀입니다. <br/>여기서 ‘자기 십자가’는 예수님의 말씀을 실제로 접했을 제자들에게는 고난이나 수난 정도가 아닌 죽음을 각오하는 삶으로 다가왔을 것이라 추정됩니다. <br/>실제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동일하게 생명을 내어놓는 순교의 삶을 살았다는 것도 그 증거입니다. <br/>그 이후로는 주로 개인적인 소명과 삶의 고난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br/>예를 들면 ‘자기 십자가’라고 하셨으니 각 사람마다 십자가의 내용이 다를 것이라 여겨<br/>&nbsp;병, 가난, 오해, 박해, 실패, 외로움 등 그리스도를 따름으로 감당하게 되는 고난을 십자가로 이해합니다. <br/>이 고난 속에는 삶을 어렵게 만드는 배우자도, 자식도, 사람도, 직장도, 물질도, 사명도 역시 포함될 것입니다. <br/><br/>&nbsp; &nbsp;  물론 이 모든 것이 다 ‘자기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br/>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문제와 어려움들은 예수님을 따름에 있어 장애가 될 수 있는 요소들이지,<br/>&nbsp;예수님을 따르는 방식은 아니라는 점에서 예수님이 뜻하신 ‘자기 십자가’인가에 대하여 의구심이 듭니다. <br/>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이 결코 동떨어진 말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된 것임을 생각해볼 때 <br/>‘자기 십자가’ 또한 ‘자기 부인’과 동일한 것을 의미할 것이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nbsp;  예수님의 십자가가 예수님의 욕망, 자존심, 명예, 주도권을 다 내려놓고, 자신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가 주되신 장소였다면, <br/>우리의 ‘자기 십자가’도 역시 동일한 의미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이 자신의 욕망을 내려놓으셨기에 고난의 십자가 위에 끝까지 달려 계실 수 있었고, <br/>자존심을 다 버렸기에 조롱을 다 견딜 수 있으셨으며, 명예를 다 내려놓으셨기에 모든 수치를 마다치 않으셨고, <br/>주도권을 하나님께 다 드리셨기에 못 박는 자들을 향한 용서를 선포하시며 끝내 아버지께 영혼을 부탁할 수 있으셨습니다. <br/><br/>&nbsp; &nbsp; 결국 예수님의 ‘자기 십자가’가 핍박, 박해, 고통, 좌절, 죄인을 견디시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 해할 수 없는 ‘자아의 죽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br/>이미 십자가에 죽은 존재이기에 그 어떤 문제와 어려움이 다가와도 감정도, 욕구도, 계획도, 주장도 펼칠 필요조차 없어진 것입니다. <br/>오른뺨도 왼뺨도, 겉옷도 속옷도, 오리도 십리도 주님께는 그 의미를 잃었습니다. 이미 아버지 손에 다 맡겼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br/>그러므로 우리의 ‘자기 십자가’는 곧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롬 6:6)이며,<br/>“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의 축소판인 것입니다. ‘자기 십자가’는 곧 자기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는 것입니다. <br/><br/>&nbsp; &nbsp; 그러므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름은 우리의 죽음이 매달려 있는 것을 항상 달고 다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br/>그 목적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이제는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임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br/>주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욕망, 자존심, 명예, 주도권을 다 아버지께 드리셨던 것처럼, <br/>우리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에 함께 못 박혀 주께 이 모든 것을 이미 다 드렸음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br/>그래서 자기 십자가는 어떤 고난과 박해, 역경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근본이 됩니다. <br/><br/>갬&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Fri, 16 Jan 2026 17:30:52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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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왜 모두에게 강력한 환상을 보이지 않으실까?</title>
<link>http://www.namsanch.or.kr/bbs/board.php?bo_table=thought</link>
<description><![CDATA[계시록을 읽다보면 시작부터 커다란 의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사도 요한에게 알게 하신 것입니다. <br/>그리고 요한을 통해 이 세상의 모든 교회를 뜻하는 일곱 교회에 본 것과 들은 것을 편지로 써서 전하라고 하십니다. <br/>여기서 “왜 하나님께서는 모두에게 동일한 환상을 보여주시지 않으시고 굳이 기록하여 교회들로 보내라고 하실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br/>요한이 본 환상을 모두가 동일하게 보고 듣는다면 더욱 강력하고 위력적인 변화를 기대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이런 생각을 하다가 지금 현재의 계시록 해석을 놓고 벌이는 상황들을 돌아보며 이해가 저절로 되었습니다. <br/>이렇게 한 사람이 분명하게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적어서 모든 교회가 통일성 있게 읽고 알 수 있도록 전달했음에도 불구하고 <br/>지금 현재 계시록은 정통과 이단 사이의 주도권 전쟁이 치열하다는 사실입니다. <br/>만약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모두에게 동일한 환상을 보여주셨다면 <br/>지금 현재 벌어지는 국지전은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세계 대 전쟁이 벌어졌을 것을 짐작해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br/>동일한 것을 보았을지라도 각자가 가지고 있는 민족과 문화의 차이, 지식의 차이, 이해도의 차이, 나이와 경험으로 인한 수용력의 차이, <br/>가치관과 이념의 차이 등 수많은 차이들로 인해 단 한 권의 책도 정경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br/>그리고 교회는 자신의 체험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주도권을 잡고, 교단 분리를 넘어서 교회마저도 산산이 흩어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br/><br/>&nbsp; 이러한 상황을 다 아신 하나님께서 기나긴 세월 동안 믿음의 연단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 하나만 <br/>그 심령에 가득한 노 사도를 통하여 주의 계시를 전하는 통로로 삼으셨습니다. <br/>그리고 먼저 보고 들은 사람인 사도 요한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br/>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고 분명하게 선언하십니다. <br/>모든 사람에게 환상을 보여주면 그 순간은 강력해 보여도 시간이 지나며 점차 희미해지고, 희석되며, 심지어는 기억에서 지워져 버리기도 합니다. <br/>그로 인해 내용이 각기 다양하게 왜곡될 것이 분명하나 기록된 말씀은 시대를 넘어, 좋든지, 나쁘든지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br/>이 세상의 모든 교회가 동일하게 붙들 수 있는 통일된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br/>이렇게 환상은 본 사람 조차도 기억에서 희미해지는 안타까움이 있지만 기록된 말씀은 시간과 장소에 관계없이 언제든 펼쳐 읽을 수 있는 영구적인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가 되는 것입니다. <br/>하나님께서는 한 순간을 압도하는 강력하지만 약점이 많은 환상으로 모두를 이끄시기 보다는, <br/>비록 잔잔하지만 시대를 넘어 지속적인 능력으로 역사할 수 있는 기록된 말씀을 택하신 것입니다. 환상은 순간적이지만 기록은 영구적이기 때문입니다.<br/><br/>&nbsp; 그러나 강력한 환상체험에 비하면 잔잔한 것처럼 보이는 말씀도 ‘말씀 앞에서’라는 복음성가의 가사인 <br/>“기록된 말씀 힘이 있어서 진리로 우릴 거룩케 하며 거룩한 말씀 세세 영원히 복음이 되어 말씀하시네”처럼 지금도 살아서 능력 있게 역사하고 있습니다. <br/>그 이유는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된 환상이 말씀이 되어 그 말씀을 읽는 자에게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환상으로 다시 살아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br/>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계시록을 통해 사도 요한과 같이 동일한 것을 믿음의 눈으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br/><br/>김&nbsp; 재&nbsp; 구&nbsp; 목사]]></description>
<dc:creator>한영순</dc:creator>
<dc:date>Wed, 14 Jan 2026 17:06:45 +0900</dc: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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