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복음으로 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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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한영순 댓글 0건 조회Hit 143회 작성일Date 26-08-07 14:04본문
요한복음의 기록들은 단순한 이야기처럼 읽히지만, 그 안에는 깊고도 높은 영적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난 사건 역시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북동쪽,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이곳은 두 개의 큰 저수조와 그 사이를 잇는 둑이 있었으며, 그 둑을 따라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요한은 굳이 그 행각이 ‘다섯’이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건축 구조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겠지만,
상징적으로는 유대인의 율법인 모세오경(토라)을 연상시킵니다. 만일 이 상징을 염두에 둔다면,
베데스다는 율법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처소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공간으로 다가옵니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믿음은 치열한 경쟁을 낳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율법주의가 만들어 낸 왜곡된 구원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의를 증명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는 서로를 세우기보다 경쟁하고 정죄하는 곳이 되었고, 누군가는 언제나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38년 된 병자입니다. 38년이라는 기간은 우연한 숫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순종한 후 광야에서 방황했던 38년을 강렬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신 2:14).
이는 율법을 받았지만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전적 무능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병자에게는 연못이 있었지만 들어갈 힘이 없었습니다. 기준은 있었으나 능력이 없었고, 원함은 있었으나 행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병자가 먼저 예수님을 찾은 것도 아니며, 믿음을 증명하거나, 특별한 공로를 세운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회복의 길로 이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과감하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은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누워 있던 인간에게 은혜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거룩한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은혜는 율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합니다.
억지로 지키던 계명이 사랑으로 살아내는 삶이 되고, 무거운 짐이었던 율법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이 되며, 세상을 향한 희망의 빛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저마다 내려놓지 못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실패의 자리, 상처의 자리, 자기 의의 자리, 율법주의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번쩍 들고 과감히 걸으라하십니다. 이제 그 자리는 더 이상 우리를 얽어매는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증거가 됩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그 자리에 붙들려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 자리를 들고 주님을 따라 걸어갑니다.
율법 아래 눕던 사람이 은혜로 일어나 진리 안에서 걷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안식이며, 복음입니다.
김 재 구 목사
베데스다 연못에서 일어난 사건 역시 그렇습니다. 예루살렘 구시가지 북동쪽, 양문 곁에는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었습니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이곳은 두 개의 큰 저수조와 그 사이를 잇는 둑이 있었으며, 그 둑을 따라 다섯 개의 행각이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요한은 굳이 그 행각이 ‘다섯’이었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물론 이것은 단순한 건축 구조에 대한 설명일 수도 있겠지만,
상징적으로는 유대인의 율법인 모세오경(토라)을 연상시킵니다. 만일 이 상징을 염두에 둔다면,
베데스다는 율법 아래 살아가는 인간의 처소를 고스란히 보여 주는 공간으로 다가옵니다.
연못의 물이 움직일 때 가장 먼저 들어가는 사람은 어떤 병이든 낫는다는 믿음은 치열한 경쟁을 낳았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들어가야만 살 수 있다는 생각은 율법주의가 만들어 낸 왜곡된 구원관을 떠올리게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한 선물이지만, 인간은 그것을 자신의 의를 증명하는 도구로 삼았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는 서로를 세우기보다 경쟁하고 정죄하는 곳이 되었고, 누군가는 언제나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38년 된 병자입니다. 38년이라는 기간은 우연한 숫자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가데스바네아에서 불순종한 후 광야에서 방황했던 38년을 강렬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너기까지 삼십팔 년 동안이라 이 때에는 그 시대의 모든 군인들이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진영 중에서 다 멸망하였나니”(신 2:14).
이는 율법을 받았지만 그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하는 인간의 전적 무능을 상징적으로 보여 줍니다.
병자에게는 연못이 있었지만 들어갈 힘이 없었습니다. 기준은 있었으나 능력이 없었고, 원함은 있었으나 행함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율법 아래 있는 인간의 실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를 친히 찾아오셨습니다.
병자가 먼저 예수님을 찾은 것도 아니며, 믿음을 증명하거나, 특별한 공로를 세운 것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먼저 찾아오셔서 회복의 길로 이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만, 주님께서 다 하셨습니다.” 이 고백이야말로 진정한 복음의 시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안식일에도 과감하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이 말씀은 단순히 병이 나았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율법 아래 누워 있던 인간에게 은혜로 일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라는 거룩한 초청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분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은혜는 율법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기쁨으로 순종하게 합니다.
억지로 지키던 계명이 사랑으로 살아내는 삶이 되고, 무거운 짐이었던 율법은 주님 안에서 참된 안식이 되며, 세상을 향한 희망의 빛이 됩니다.
오늘도 우리에게는 저마다 내려놓지 못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실패의 자리, 상처의 자리, 자기 의의 자리, 율법주의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를 번쩍 들고 과감히 걸으라하십니다. 이제 그 자리는 더 이상 우리를 얽어매는 절망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는 증거가 됩니다. 과거에는 우리가 그 자리에 붙들려 있었지만, 이제는 우리가 그 자리를 들고 주님을 따라 걸어갑니다.
율법 아래 눕던 사람이 은혜로 일어나 진리 안에서 걷는 것,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참된 안식이며, 복음입니다.
김 재 구 목사


